밀양시 산외면

2018. 7. 9. 14:23故鄕

밀양시 산외면(山外面)

지세와 연혁

실혜산(實惠山, 가지산 迦智山)의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내려와 백암산, 중산, 낙하산(落霞山, 일명 落花山으로 표기), 보두산에 이른다. 면의 동은 백암산의 정상인 백암봉을 중심으로 하여 산내면과, 서쪽으로는 보두산에서 내려온 비학산의 능선을 사이에 두고 상동면과 남쪽으로 단장천을 경계로 해서 단장면과 밀양시 교동, 용평동, 북쪽으로는 백암봉, 중산, 보두산의 능선을 경계로 하여 각각 면계를 이루고 있다

면의 뒤쪽으로는 큰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산내면의 동천과 단장천에서 내려오는 단장천이 합류되어 단장천을 이루면서 이 면을 통과하여 응천강(凝川江, 의천강, 밀양강, 남천강)으로 흐른다.

조선 초기 밀양도호부 시대에는 중동면으로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밀양도호부의 동쪽에 있었으며 상동면과 하동면(삼랑진읍)의 중간에 있다고 하여 중동면이라 했다.

당시의 중동면은 지금의 산외, 산내, 단장 세 면을 포괄하는 넓은 구역이었다. 산외면은 임진왜란 후 17C 초에 방면을 정비할 때 천화면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산외면에 해당하는 방리로는 희곡, 금곡, 남가곡, 와야 , 죽원 등 5개 리였다. 그 후 천화면을 중초동, 중이동, 중삼동면으로 분할한 일이 있다. 그러다가 1880년대에는 중초동(현재의 산내면), 중이동면(현재의 산외면)을 통폐합하여 천화면으로 환원하였고, 중삼동면은 단장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곳(중동면)은 이 면(산외면)의 발상과 중심지가 천화령(석남고개)의 아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1895(고종 32)에 천화면을 분할하여 천화산내면과 천화산외면으로 나누었다. (산외면)의 동쪽에 있는 백암봉(삼락정 서쪽 능선)을 경계로 하여 그 안쪽에 있는 중초동면을 천화산내면이라 하고, 그 바깥쪽에 있는 중이동면을 천화산외면이라 했다.

이 때 산외면의 방리로는 희곡, 금곡, 죽동, 죽서, 와야, 엄광, 남기리 등 7개리가 있다. 방리의 표기도 다시 변경되었는데 죽원(다죽리)이 죽동, 죽서로 나누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남기, 엄광, 금천, 다죽, 금곡, 희곡리 등 6개의 법정리를 이루었으며, 1918120일에 행정 구역의 명칭 변경에 따라 천화산외면에서 산외면으로 개칭되었다. 19656개 법정리에 소속된 자연마을을 조정하여 19개의 행정리로 재편성하였다.

유적으로는 금천리의 지석묘군과 고분군, 다죽리의 지석묘군과 고분군 등이 있고, 또 봉성사지(금곡리 한천공장 뒷산 산록)와 엄광사지(엄광리 다촌 동편 마을에 속하며, 중산 제2봉의 산록에 있음) 등이 있다

6개 법정리 19개 행정리(자연마을)

다죽리(다원1, 다원2, 죽남, 율전)

금곡리(본촌, 단산)

희곡리(박산, 보라, 괴곡)

금곡리(신기, 대촌, 화동)

남기리(남가, 남계, 양덕, 정문, 기회)

엄광리(숲촌, 다촌)

다죽리(茶竹里)

지명유래

뒤로는 중산의 줄기에서 내려 온 꾀꼬리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평전산(平田山), 서쪽으로는 다원동산이 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남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으로 북천이 흘렀으나 지금은 다원들 건너편으로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다.

꾀꼬리봉의 아래쪽에 다원1, 2리가 위치하고 잇고, 평전산 기슭에 죽남동이 있다. 다원들 가운데에 율전동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 국도 24호선이 동서로 통과하고 있어서 교통도 편리한 곳이며, 남쪽으로 트여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원들 가운데 있었던 지석묘군과 평전산 기슭에 있는 고분군 등이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문헌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잘 알 수가 없다.

이 마을에 있는 모당천(毛唐泉)의 사적으로 보아 고려말 조선초에 이미 모씨와 당씨가 입촌하여 살았다고 전하나 그 사적은 알 수가 없다.

조선 후기에 와서 죽동리와 죽서리로 방리가 나누어졌다. 지금은 산외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은 죽동, 서쪽은 죽서로 나누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죽동, 죽서, 죽남, 율전을 병합하여 다죽리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일제 말기에 죽남과 율전이 죽동에서 분동이 되었다. 1965년에 행정리를 조정하면서 다원1. 2, 죽남, 율전 등으로 나누어졌다. 자연 마을도 다원 1, 2, 죽남동, 율전동 등 4개 동으로 이루어졌다.

또 산외면사무소와 경찰지서 등이 있어서 산외면의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금천리, 서쪽으로는 남기리, 금천리와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꾀꼬리봉을 경계로 하여 엄광리, 금곡리와 인접해 잇다. 남쪽으로는 단장천을 사이에 두고 단장면과 면계를 이룬다. 유적지로는 다죽리 지석묘군과 고분군, 모당천(毛唐泉), 혜산서원, 죽원재사 등이 있다

죽서 마을 서쪽 산기슭에는 단장면 고례리에 있는 밀양댐에서 상수원을 공급 받아, 정수를 하여 밀양과 창녕지역으로 식수를 공급하는 밀양댐 광역상수도 정수장 시설이 있다

다원 1(茶阮 1, 다원 茶阮, 죽서 竹西)

꾀꼬리봉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옛 이름은 다원이라고 한다. 다원이라고 한 것은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이 차나무는 보두(步斗)라는 중이 중국에서 갖고 와서 엄광사의 주변에 재배하였다고 하는데 이 마을까지 번식하였다고 한다.

본래의 이름은 죽원이었는데 다원이라고도 하였다. 마을 앞에 관율숲이 있었는데 밤밭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겨 밤밭 즉, 율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마을로 면소재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예부터 ()나무가 유명하여 다원이라 불리었으며, 이 차나무는 보두라는 중이 중국에서 갖고 와서 재배하였는데 현재 600년 된 차나무가 혜산서원에 있다. 일직손씨의 집성촌으로 도유형문화재 297호로 지정된 혜산서원을 비롯하여 다량의 고택이 있어 중요문화인 및 고건축에 관계되는 인사들이 자주 방문하고 있으며, 주업은 깻잎하우스 벼농사와 대추나무재배 등이 있다.

이 마을에는 일찍이 밀성박씨 일파가 입촌하여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조선조 중기에 진사 손호(孫顥)가 이 마을에 입촌한 후 일직손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재사로는 영모재가 있으며, 손호가 이 마을에 입촌한 후 후진 양성을 위한 강습소로 정우헌을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753년에 창건한 격재 손조서(孫肇瑞)를 봉안한 서산서원이 있었는데 1868년 조령으로 훼철된 후 서산고택 또는 철운재로 편액하였다.

1971년 서원의 경역을 확장. 정비하고 각지에 분산 봉안되었던 일직손씨 명현의 다섯 서원을 후손들이 세거지인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고 혜산서원으로 중건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 서원의 경내에 격재 손조서 신도비문, 다원서당, 이이정(怡怡亭) 등이 있다. 또 수사 손명대의 영정각과 손응룡의 소강정사인 경선재, 양진당 손순룡의 은거서식소였던 양진당, 동오당 손기옥의 추모재사인 동산정 등이 각각 보존되고 있다.

민속놀이, 전설, 민요

편싸움놀이(石戰놀이): 산외면 다죽리 죽동과 죽서마을에서는 조선조 말기부터 매년 정월보름날을 전후하여 죽동, 죽서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 들판에서 동민끼리 달맞이를 하며, 서로 편을 짜서 돌팔매질로 싸움을 하는 놀이가 있었다. 이 날 오후가 되면 죽동 마을 사람들은 다원들 가운데서 죽서마을 사람들은 행랑소 앞 터짐이 둑 앞에서 각각 달집으로 짓고 농악을 울리며 돌팔매질 놀이를 했는데, 석전이 오래 계속되면 마을 어른들이 중간에 들어서서 화해를 시키고 다친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 위문하면서 일 년 내내 마을의 평안을 빌었다고 한다. 싸움과정에서 부상자가 생기는 등 위험부담이 많아 지금은 없어 졌다. 이 편싸움 놀이의 형태와 구성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 목적은 서로 집단의 위세를 떨치고 내부적인 단결을 도모하며 상대방과의 친선융합의 계기를 만드는데 놀이의 참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유물, 유적

혜산서원(惠山書院)지방유형문화재 297

소재지: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607번지

산외면 다죽리 죽서(竹西)마을에 세거(世居)하는 일직손씨(一直孫氏)5()을 받드는 서원으로 본래는 영조 29(1753)에 창건한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1412-?)의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던 자리이다. 격재는 조선초기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의 횡포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충의와 탁절(卓節)로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오직 도학에만 전념한 학자인데 후일에 사림(士林)들의 추앙을 받아 이곳에 서원을 세웠으나 고종 5(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된후 그 집을 "서산고택(西山古宅)" 또는 철운재(徹雲齋)로 편액(扁額) 하였다. 1971년에 서원의 경역을 확장 정비하고 각지에 분산 봉안되었던 일직손씨 명현 다섯 분의 서원(書院)인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1287-1379)의 안동 타양서원(陀陽書院),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의 밀양 서산서원(西山書院),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 문탄(聞灘) 손린(孫燐:1566-1628)의 대구 봉산서원(鳳山書院), 륜암(綸菴) 손우남(孫宇男:1564-1623)의 영천 입암서원(立巖書院) 등을 후손들의 세거지인 이곳으로 옮겨 복설(復設) 하고 혜산서원(惠山書院)으로 중건한 것이다. 서원의 규모는 1,300여 편의 대지위에 사우(祠宇), 강당(講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상례문(尙禮門), 이이정(怡怡亭), 고사(庫舍), 대문(大門)13동의 건물이 경역에 자리 잡고 있다.

격재선생문집책판(格齋先生文集冊板)지방유형문화재 298

소재지: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607번지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병조정랑(兵曹正郞), 봉산군수(鳳山郡守)를 역임하였던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1412-?)는 단종(端宗)의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한 세조(世祖)의 횡포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충의(忠義)와 탁절(卓節)로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오직 도학(道學)에만 전념한 학자인데 그의 문집(文集) 목판(木板) 46매가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 혜산서원(惠山書院)에 보관(保管), 전승(傳承)되고 있다.

다죽리 손씨고가(茶竹里 孫氏古家)

소재지: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237-1번지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에 있는 일직손씨(一直孫氏) 들의 많은 고택 가운데 <손병사고택(孫兵使古宅)>으로 통하는 이 집은 영조연간(1724-1776)에 병사(兵使) 손진민(孫鎭民)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그 아들인 병사(兵使) 손상용(孫相龍)이 택지를 확장하고 건물을 증축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저택이 조성되었다. 건물의 배치 형식은 영남지방 상류고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내외 생활의 공간을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하여 담장과 중문으로 경계를 지었다. 안채의 공간은 넒은 안마당을 중심하여 그 북쪽에 정침(正寢)이 남향으로 앉았고, 좌우에는 곡간과 행랑방(行廊房)을 둔 별채가 배치되었으며, 정침 맞은편에도 별동(別棟)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정침의 구조는 72열의 팔작(八作)지붕으로 가운데 2칸의 대청과 큰방이 있으며, 왼쪽에 부엌과 오른쪽에 건넌방이 붙어 있다. 장대석(長大石)으로 이루어진 정침의 축대(築臺)에는 세군데 돌계단을 두었고 부엌내부의 시렁과 찬간 등의 구조가 특이하다. 안채의 오른편에 나란히 자리 잡은 사랑채 공간에는 북쪽으로 팔작지붕 42열의 정당(正堂)이 남향으로 앉아있고, 그 건너편 입구에는 행랑방이 좌우에 붙은 대문채가 있으며 사랑마당은 수석(樹石)이 조화를 이룬 정원(庭園)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에는 죽계서당(竹溪書堂)과 모연재(慕蓮齋)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새터: 절터골 앞에 있는 마을이다. 새로 생겼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사안대(謝安臺): 죽서 마을 북쪽 새터 앞에 흙으로 높직하게 쌓아 올린 대를 말한다. 옛날 이 마을 어른들이 이곳에 대를 쌓아 이 마을의 학도들로 하여금 여기에 올라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중국 동진 때 문무를 겸비한 재상으로 인품이 뛰어난 사안(謝安)과 같은 인품을 닦으라는 뜻에서 만든 것이라 한다.

동산(東山, 사안동산 謝安東山, 연주산 連珠山): 죽서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이다. 사안동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안대의 부근에 있는 산이라고 붙인 지명이라고 한다. 연주산이라고 한 것은 이 산의 3개 봉우리가 구슬을 이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또 이 산의 아래쪽에 어대(魚臺)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행랑소에서 낚시를 했다고 한다. 이 바위에는 독립의사성하손공사적비(獨立義士成河孫公事跡碑)가 있다.

행랑소(行廊沼, 행랑소 行浪沼): 죽서 마을 입구에 있었던 소이다. 옛날에 동천이 이 마을 앞으로 흐를 때 마을 입구에 잇는 다원동산 아래쪽에 깊은 소가 있었는데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행랑에 가는 거리 쯤 된다는 의미에서 붙은 지명이다. 또 행랑소라고 한 것은 소가 넓어서 늘 물결이 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터짐이: 다원1구 마을 앞 도로변 밑에 있는 모퉁이 둑으로 행랑소의 아래쪽에 있었다. 이곳에서 단장천까지 도랑이 있었다. 다원 뒷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의 양이 많아서 이 모퉁이 둑이 잘 터진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앵무배미: 행랑소의 아래쪽에 둑을 따라 남서 방향에 있던 논이다. 옛날 살내에서 다원으로 시집온 신부가 앵과 무라는 몸종을 데리고 왔는데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재산으로 산 논이라 하여 몸종의 이름을 따서 앵무배미라고 했다 한다.

송곳방우: 꾀꼬리봉 밑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의 모양이 송곳같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벼락방우: 송곳방우 밑에 있는 바위이다. 벼락을 맞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양덕골: 죽서 마을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남기리 양덕 마을로 넘어가는 양덕고개가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무시묵골: 양덕골과 절터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절터골: 새터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무시묵골과 서나무골 사이에 있는데 옛날부터 절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지금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옛날 이 곳에 서산고택이 있었다고 하며, 또 이곳에 부처샘이 있는데 물맛이 좋다고 한다.

서나무골: 절터골과 갓골짝 사이에 잇는 골짜기다. 이곳에 서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붉은방우: 서나무골 중턱 산기슭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에 붉은 이끼가 많아서 붉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서늘방우(시원한 방우): 붉은 방우의 위쪽에 있는 바위이다. 이곳에 앉으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도 시원하다고 해서 서늘방우, 시원한 바우라고 한다.

마당방우: 서늘방우 위쪽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마당 같이 넓적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갓골짝: 서나무골과 재사등 사이에 있는 골짜기다. 주변의 산세가 갓()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등(武嶝): 서나무골과 갓골짝 사이에 있는 산등성이다. 산세가 마치 를 닮았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감태방우: 갓골짝의 위쪽 산기슭에 있는 바위이다.

앞내길: 다원 행랑소를 출발하여 다원들, 신기동으로 해서 범머리나루터를 건너 살내마을로 해서 살래다리를 통해서 영남루 기슭으로 가는 길이다.

뒷내길: 다원에서 왜우를 지나 정문, 긴늪, 법북, 교동으로 해서 밀양시내로 가는 길이다

다원 2(茶阮 2, 죽원 竹阮, 죽동 竹東)

평전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 이름은 죽원이다. 죽원이라고 한 것은 이 마을의 동쪽에 있는 평전산 기슭에 죽림이 무성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후기에는 죽동리라고 했다. 현재의 행정리동명은 다원 2리이다

이 마을에 조선조 중기에 생원 손겸재가 입촌한 후 밀성손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재사로는 오한(聱漢) 손기양을 향사하는 별묘의 치재소인 죽원재사와 죽포(竹圃) 손사익의 강학소인 죽포정사가 각각 보존되고 있다. 또 문암 손석관의 각학소인 문암초허(門巖草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유물, 유적

모당천(毛唐泉): 죽동의 죽원재사 밑 밑에 있는 고정(古井)이다. 중국 원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이곳까지 온 모씨와 당씨가 거주하며 그들의 식수를 위해 팠던 샘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당샘 혹은 모당천이라 한다. 지금도 샘가에 있는 돌에 모당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잇는 당씨들 중에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 때 이 마을에 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영산들, 예안들: 죽동 마을 앞 넓은들 가운데에 부분적으로 붙여진 들 이름인데 지금 산외면사무소 앞에 있는 들을 예안들, 그 아래 남쪽에 있는 들을 영산들이라고 한다. 영산들, 예안들이라고 한 것은 옛날에 이곳으로 시집온 신부가 가지고 온 재산으로 산 논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 영산에서 시집온 신부가 산 논을 영산들, 예안에서 시집온 신부가 산 논을 예안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산다리: 죽동마을에서 영산들로 가는 곳에 봇도랑이 있었고 이를 건너기 위해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영산들에 있었기 때문에 영산들 다리라고 한다. 이 말이 줄여져서 영산다리리고 불렸는데 길고 큰 두 개의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딸개방우산(달개바우산): 죽동 마을의 동쪽 평전산의 남쪽 끝 부분에 있는 산이다. 이 산 위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중에서 달개비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날끝다리: 딸개방우산의 아래쪽에 있었던 다리이다. 옛날 이 곳으로 북천수가 흐를 때 나루터였다고 한다. 딸개방우산의 끝 부분의 보습의 날과 같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하여 날끝이라 부르고 이곳에 있었던 다리라고 해서 날끝다리라 하는데 지금은 경지정리 사업으로 다 매몰되었다고 한다.

돌빼기논: 다원들 가운데에 띄엄띄엄 여러 개의 바위가 논에 박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바위가 넙적해서 5~6명 이상 앉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경지정리 때문에 다 매몰되었다. 또 이 논에 있는 바위를 용띠방우라고도 하는데 마치 용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장군석방우: 돌빼기논에 여러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두 개의 바위를 손대장군방우, 박대장군방우라고 부른다. 옛날에 두 장군이 서로 힘을 겨루기를 하면서 이 바위를 던졌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이는 지석묘로 추정되며, 지금은 경지정리 때문에 모두 다 매몰되었다고 한다.

칠리탄(七里灘): 재악산(載岳山) 영정물, 호거산(虎踞山 운문산의 구연물(시례 호박소), 단장면의 고사산(姑射山 고예산)에서 생긴 지명이라 한다. 또 일곱실(七谷)에서부터 칠탄정의 위에 까지 약 7리를 여울져 흐른다고 하여 칠탄리라 불렀다고 한다. 산동 지방의 7개소의 냇물 즉, 이천(밀양댐 상류 양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의 골짜기배내천), 구천(귀내, 단장면 구천리), 국전천(단장면 국전리), 구만천(산내면 봉의리), 구연수(臼淵水, 산내면 얼음골 위 호박소), 발례천(산내면 임고리) 등의 냇물이 모여 흐르는 곳이라 하여 칠탄(七灘)이라 한다.

등잔소(燈淵): 칠탄정의 아래쪽에 있는 약 100m 지점을 가리키다. 그 아래쪽에 큰 바위가 있고, 소가 있는데 낚시하는 사람들이 밤이 되는 줄 모르고 계속하다가 등불을 켜놓고 밤늦도록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다 매몰되었다.

물방우골: 죽원재사의 뒤에 있는 골짜기로서 이곳에 고래장터가 있었다고 하며 토기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당산껄: 죽원재사 뒤에 큰 노송나무가 있는 일대를 말한다. 이 나무가 당산나무로 매년 정월 초닷샛날에 이 노송에 당산제를 지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갓(징갓): 죽원재사 뒤 재사등의 아래쪽에 있다. 옛날 마을에 질 좋은 징이 있었는데, 그 소리가 유난히 아름답고 멀리까지 울려서 이을 탐내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징을 도둑맞을 것에 대비하여 은밀한 곳에 묻어 두기로 했는데, 그 곳을 징갓이라고 한다. 뒷날 이 곳에 묻어 두었던 징은 강바위라는 자가 훔쳐 갔다고 한다.

솔찜이밭: 뭉개방천 앞에 있어 솔찜이밭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옛날 애장(兒葬)터가 있었던 곳이다.

뭉개방천: 솔찜이밭의 위쪽에 있었던 방천이다. 장마 때마다 동천이 넘쳐서 무너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중국인이 이곳에 살면서 제방을 쌓은 뒤로는 잘 견디었다고 한다. 19589년 사라호 태풍 때 다시 무너졌다고 한다.

이망쟁이밤밭: 뭉개방천 아래쪽 방천 너머 하천 안쪽에 있었던 밤밭이다. 밤밭 주인이 대머리였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잇따리목: 단장면 미촌리 쪽에 있는 우수비알의 아래쪽 하천가에 징검다리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다리는 다죽리 사람들이 우수비알에 소를 방목하기 위하여 다니기도 했으며, 단장면 구미, 사촌리 사람들이 밀양장으로 다닐 때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계법보(桂法洑): 금곡교에서 단장면 미촌리로 돌아가는 산모롱이에서 단장천에 걸쳐 있는 보()이다. 보머리는 금곡들 쪽에 잇다. 이 보는 단장천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다원들에 물을 댄다.

신청천터(申靑泉): 죽원재와 딸개방우산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골짜기에 있는 샘이다. 옛날 신청천(申靑泉)의 어머니가 청천을 임신한 후부터 샘물이 말랐다가 열 달이 지나 그가 출생하지마자 샘물이 다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를 연유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청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샘을 신청천이라 한다. 밀주지에 신청천의 아버지인 신일성의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이들은 합천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재사등(齋舍嶝): 갓골짝의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이곳에 죽원재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등의 아래에 징갓이 있다.

당산나무껄: 죽동 마을에서 율전으로 가는 한 중간 들 복판에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을 당산나무껄이라고 한다. 즉 돌빼기논 아래쪽이 된다.

고래들(古來坪): 당산나무껄에서 밤밭쪽으로 걸쳐 있는 들이다. 이곳에는 물이 많이 괴어 있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아주 옛날부터 자연적으로 물이 많이 괴여 논이 된 곳이다.

감말리논: 고래들과 솔찜이밭 사이에 있는 논이다. 가뭄을 많이 타기 때문에 붙인 지명이다.

죽남동(竹南洞)

다원 2리 동쪽 평전산 기슭에 잇는 마을이다. 죽남이라고 한 것은 다죽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지명이다. 일제 강점기에 죽동사람들이 이곳에 농막을 짓고 영농고나리를 하면서 한 두 집이 입주하여 정착한 후 생긴 마을이라 한다. 원래는 죽동에 소속된 마을이었는데 일제 말기에 율전과 함께 분동되었다. 행정상으로는 죽남동이라고 한다. 지금은 윗각단, 아래각단 등 두 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죽남다리: 죽남 마을에서 괘법보로 가는 길목에 큰 봇도랑이 있는데 이곳에 놓인 돌다리이다.

탑골보: 죽남 마을 앞 다리 밑에 있는 보이다. 금곡리의 여러 산골짜기에서 물이 내려오는데, 이 물을 받아서 죽남 앞들에 관개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탑골들: 죽남 앞들이다. 탑골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탑골은 금곡리 남동쪽 평전산 산록의 옛날 봉성사 절이 있던 골짜기이다.

율전(栗田)

다원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활성 2통인 구서원을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인데, 단장천 마을 앞을 흐르는 단장천 건너 활성2통인 구서원 마을 안골짜기에는 영원사지와 덕성서원의 구지가 있었는데 리더스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졌다. 다원밤밭 혹은 밤밭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밤밭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생산된 밤을 관청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관율숲(官栗藪)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서남쪽을 아래밤밭이라고 했는데 이곳에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엇다고 하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몯 떠 내려가고 지금은 또 경지정리를 하여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금곡리(金谷里)

용암산, 독조산이 둘러있고 마을 앞엔 금수가 흘러 일찍부터 마을이 융성하여 밀양부의 동창이 있었다. 운문사의 창건주 비허선사가 살았던 봉성사 유지가 있다.

금천리(琴川里)

본 이름은 와야(瓦野)인데 마을 앞에 금교들이 있으며 상말로 금물고(琴勿古), 또 욕요라 부른다. 마을 동천단장천 하류엔 긴 못이 있었는데 등연이라 불렀으며 그 남쪽에 칠곡이 있고 그 북쪽에 관율숲이 있어 동림이라 하였다.

엄광리(嚴光里)

본래는 남가곡(南佳谷)인데 일명 엄광사절이 있어 엄광리라 하였으며, 상촌, 중촌을 합하였다. 마을 뒷산을 엄광산이라 하며 또는 실혜산이라 한다. 지금은 행정리동으로 숲촌, 다촌으로 나누었는데, 다촌은 엄광사에 딸린 차밭이 있었던 곳이다.

밀양시 산외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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