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4. 22:06ㆍ經濟
사채(私債), 서민 목줄 죈다.
최근 불황타고 미등록 업체 활개… 금융소외계층 노려
사금융 시장 무려 30조 매달 200여 개 새로 생겨… 연예인·무직 여성 등이 타깃 일단 걸리면 살인적 이자율
서울 성동구의 주부 한모씨는 지난해 10월 작은 분식점을 차리려고 750만원의 사채(私債)를 빌렸다. 이중 대출 수수료와 선(先) 이자로 250만원 떼고 손에 쥔 것은 500만원. 이자만 매달 75만원을 내야 하는 연 이율 120%의 고리대(高利貸)였지만,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은행 창구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은 한씨에게는 사채 외에 별 방도가 없었다.
처음엔 "편하게 쓰고 천천히 갚으라."며 친절하게 돈을 빌려주던 사채업자는 이자를 제 때 못 갚는 날이 늘어나자 "다음에도 연체하면 애들을 풀겠다."며 협박을 시작했다. 두 번 연속으로 연체를 하자 밤늦게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10개월간 매달 100만원씩, 총 950여만 원을 힘겹게 갚고도 계속 "원금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아온 한씨는 결국 지난달 금융감독원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8일 숨진 채 발견된 탤런트 안재환(36)씨의 사망 원인이 사채업자의 빚 독촉에 따른 비관 자살로 알려지면서, 사금융(私金融)의 위험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지난 2002년 대부업법 시행 이후에도 여전히 미등록 사채업자들이 활개를 치면서 다양한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기가 나빠지는 가운데 은행 등 제도권 금융회사들이 대출 조이기에 나서면서 사채시장을 기웃거리는 서민들이 늘고 있다. 사금융은 호황기를 맞고 있다.
◆ 번창하는 30조원 사금융 시장
지난 1분기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약 640조원.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70%에 육박한다. 금융회사들이 부채가 많은 사람의 돈줄을 조이면, 이들은 사금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현재 서울 시내의 등록된 사금융업체 수는 약 6400여 개로, 이중 절반이 2007년 이후 새로 생긴 것들이다.
매달 새로 등록되는 업체도 200여 개에 이른다. 서울 명동 사채시장 전문가인 김모씨(일명 김 선생)는 "요즘 사채 시장엔 수천만~수억 원의 소액 자산으로 성형자금·해외취업자금 등 틈새 대출시장을 공략하는 '벤처기업'들이 등장하고 있다"며 "실제 사금융 시장의 규모는 30조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 사채에 손 벌리는 연예인 많아
사채를 쓰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직 여성, 비정규직 직장인이 많다. 은행과 신용카드사, 캐피탈업체 등 이른바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는 금융소외계층이다. 소득이 들쑥날쑥하고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빚을 갚을 능력이 낮다고 보고 대출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일부 연예인도 이 부류에 속한다. B시중은행 대출 담당자는 "(일부 연예인은)소득과 담보가 확실하지 않은 이상 신용대출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대중적 인기가 다한 이후 생계를 위해 사업자금 명목으로 주변에 손을 벌렸다가 사채의 덫에 걸리는 연예인들이 많다. 이를 노리고 집중적으로 연예인들 주변을 맴도는 사금융업자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생들도 사채의 주요 소비계층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사무실을 열고 있는 S(37)씨는 "하루에 받는 대출 문의 중 30~40%가 학생"이라며 "카드빚이나 휴대전화 연체액 등을 갚기 위해 소액 대출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 고리(高利) 사채의 덫
일단 사채의 덫에 걸리면 빠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악덕 사금융업체들의 경우, 연리 수백%의 고리대로 돈을 빌려주면서, 빚을 쉽사리 갚지 못하도록 하는 악랄한 수법을 쓴다.
금융감독원 서민금융지원실 조성목 부국장은 "수입이 안정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 3개월 미만의 단기 대출을 내주면서, 10일마다 한 번씩 원금의 15%에 해당하는 이자를 갚게 하고, 이를 연체하면 못 받은 이자만큼 원금을 늘리는 수법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대출자가 지키지 못할 상환 계획을 지키게 하고, 이를 어길 경우 자동으로 이자를 원금에 포함시켜 복리로 대출액을 계속 늘려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연 300~600%에 해당하는 살인적인 이자율을 적용하면, 불과 1000만원의 대출이 4~6개월 후에는 5000만원으로 불어날 수도 있다. 사채업자 윤모(40)씨는 "맘만 먹으면 아무리 갚아도 원금을 못 갚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 정부대책 실효성 의문
이런 사금융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정부는 일찌감치 서민금융활성화 대책을 궁리해왔다. 사채업을 등록 대부업으로 양성화하기 위해 2002년 10월부터 대부업법을 시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여신금융업법 개정을 통해 대형 대부업체들을 제2금융권으로 격상시키려는 논의도 하고 있다. 서민들이 좀 더 안전하게 사금융을 이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지난 2007년 한 해에만 사금융 피해가 지난해 11.6%나 증가하는 등 정부의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10/2008091001721.htm 정철환 기자 plomat@chosun.com 입력 : 2008.09.11 0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