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마을

2026. 6. 29. 12:07一般

65년 간이나 항상 생각의 한 곳에 자리잡고, 수도 없이 물어보고 지도를 찾으며 궁금했던 그곳이 오니마을(오운마을)이 아니고 바로 박진마을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박진마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 답사로 인해 내가 생각하던 그곳이 낙동강 좌안이 아니고 우안인 것을 이제야 알았다. 박진고개쯤에서 강쪽으로 바로 내려오면 맞은편이 창녕땅이고, 그곳에서 벌어진 6ㆍ25 전쟁, 소위 한국전쟁 박진전투의 상흔이 1960년대 초까지 밤이면 보였다고 한다.

엉뚱하게도 창녕 개비릿길이 강을 따라 박진마을로 진입하는 베릿길로 생각하여 그곳이 창녕 영아지마을로 착각하였으나, 다행이 거기서 친절한 시골 아낙의 도움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많이 바뀌었다. 낮선 동네였다.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던 그해였다. 우연인지 계획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마을에  얼마간 머물렀었던 그때 그 즈음에는 강가는 대밭이 울창하였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과는 거리를 좀 둔 강가 대밭과 인근하여 양조장을 하는 넓은 집이 있었다. 더 안쪽으로 논이 펼쳐졌다. 그때는 모내기가 늦었다. 그때 모내기가 한창이었으니 시기는 아마 지금쯤이었으리라. 논에는 강에서 물을 따라 들어온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붕어들이 논에서는 놀았고, 고동들도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모내기하는 논에 들어가서 붕어를 맨손으로 잡았다. 모내기하는 논이라 붕어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요령만 있으면 어렵잖게 붕어를 맨손으로 잡을 수가 있었다. 나는 도시에서 자랐지만 붕어를 잡으면서 거기서 나름대로 터득한 요령으로 아마도 내가 제일 잘 잡고 제일 많이 잡았지 싶다. 그걸 마을 아이들은 대장 격인 나이 좀 든 반도(이판도)에게 말하면서, 눈이 동그래져서 부러워 하고는 했다.

그때 마을 왼쪽산은 붉은 황토가 그대로 드러난 야산이었다. 거기에 붉은 황토로 제법 길쭉하게 지어진 옹기가마가 있었다. 도시에서 자란 나는 그것이 매양 신기하여 들러보고는 하였다. 그러나 옹기를 만드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그때 인근의 여러 면의 사람들이 박진마을에서 옹기를 구했갔다고 한다.

마을 오른쪽은 개울이 흘렀다. 제법 큰 나무와 앉을만한 바위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놀기도 하고, 콩쿨대회도 하였다. 또 아이들은 그곳 뒤를 넘어가면 의령으로 간다고들 하였다. 도로가 불비하고 교통이 불편하던 때라 아이들은 마치 다른 나라로 가는 길인 듯이 듯이 말하였다.

마을은 강가에서 쭈욱 안으로 들어간 산 쪽으로 자리했다. 아마도 큰물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아이들은 많았으나 가구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은 지방도 제1008호선 구간에 위치한 박진교가 2000년에 준공되고, 마을 위로 박진로가 지나면서 마을을 양분하고 있다. 그 때 대나무가 울창했던 그 강가에는 1990년대 낙동강 연안 개발 사업으로 제방이 산처럼 축조되었고, 양조장은 그 자리만을 가늠할 뿐 그 흔적마저 없어졌다. 너무 많이 변하였다. 산천이 여섯 번 반이나 변하였다. 거기가 그곳이라는 어르신의 설명이 없었다면 아직도 내가 머물렀던 그 마을은 풀지 못한 숙제처럼 실체 없이 안개 속에 묻혀 있었으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떠나 남녘으로 방향을 잡아 의령 읍내 솥바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 생각하니 여정은 좀 더 남았지만 마무리 단계의 어정이었지 싶다.

"의령 부림면 박진마을의 박진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 박진마을회관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m 정도 들어가면 간판은 없지만 그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올해 83세(1945년생)로 정정한 (김) 어르신께서 자전거를 수리히시는 간이 자전거수리점이 있다."
이어르신과는 예전에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지금은 기억에 없다.
이곳 간이 자전거수리점은 낙동강종주자전것길을 이용하는 자전거라이더에게 비상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이 되어줄 소중한 곳이라 생각되어 소개한다.

1. 옛길 경로

강 서쪽 육로 진입(현재의 자전거길 코스): 북쪽 합천·의령 낙서면 방면에서 낙동강 제방을 따라 뚝방길로 내려오는 경로

(1)출발: 합천·의령 경계(낙서면 아방리/여의리 방면 낙동강 제방길)

낙동강 북쪽 제방길(의령군 낙서면 여의리 일대)로 북쪽(합천군 청덕면 방향)에서 낙동강 서쪽 둔치를 따라 길게 이어진 뚝방길(제방길)을 걷는 평탄한 구간으로 강바람을 맞으며 남하한다.

(2)진입점: 의령군 낙서면 전화리 부곡마을 앞(부곡마을 입구 / 별뫼쉼터(낙서면 전화리): 평평한 제방길이 끝나고 산길(박진고개)과 마주치는 박진고개 옆 ‘낙동강 자전거 데크길’로 낙서면 전화리 제방길(둑길)이 끝나고 박진고개 산길로 접어들기 직전, 강변 절벽을 따라 물 위에 띄우듯 만들어진 자전거·보행자 겸용 교량(데크길)이 있다.

1)정취: 깎아지른 바위 절벽(옛 베릿길의 흔적) 바로 밑을 지나며, 발밑으로 낙동강 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어 옛 베릿길의 고즈넉함과 감정을 가장 유사하게 느낄 수 있다.

2)동선: 부곡마을입구에서,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강변 데크길을 따라 박진교 방향으로 최대한 강에 붙어서 걷는 경로를 선택한다.

2. 박진(泊/朴津)마을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景山里)에 속한 박진(泊/朴津)마을은 낙동강 가에 자리 잡고 있어 역사적으로 아주 굵직한 유래와 사연을 많이 품고 있는 유서 깊은 강변 마을이다.

(1)지명의 유래와 영광의 나루터

1)박진나루터: 이 마을은 예로부터 낙동강 하류의 가장 핵심적인 나루터 중 하나인 '박진나루'가 있던 곳이다. 과거 부산 구포나 다대포에서 소금, 생선, 젓갈 등을 싣고 올라오는 장사배들이 중간에 쉬어 가고, 신반 한지(韓紙)나 인근의 옹기를 실어 나르며 물물교환을 하던 북적이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지명 유래: 명칭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에 과거를 보러 가던 '박진'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 마을 지형이 '박'처럼 둥글게 생긴 옹기 가마를 닮아 박진이라 했다는 설 등이 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창녕군(남지읍) 쪽은 '좌두박진', 의령군(부림면) 쪽은 '우두박진'이라 부르며 구분하기도 했다.

2)임진왜란과 곽재우 장군의 승전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왜군의 보급선과 병선이 낙동강 상류로 치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낸 숨은 요새이다. 곽재우 장군은 강물 속에 커다란 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아 왜선이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뒤, 화살에 불을 붙여 쏘아 왜선을 전멸시켰는데 그 격전지가 바로 이 박진나루 앞 강물이었다. 마을 뒷산에는 당시의 흔적인 박진산성이 남아 있다.

3)6·25 전쟁 최후의 보루(박진지구 전투)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켜낸 낙동강 방어선의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중 하나이다. 1950년 8월, 북한군이 밀양과 부산을 함락하기 위해 박진나루를 통해 낙동강 도하를 시도했고, 이를 미군과 아군이 온몸으로 막아냈다. 이곳이 뚫리면 나라 전체가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격렬한 전투 끝에 사수함으로써 인근 창녕 쪽에 '박진지구 전적비'가 세워질 만큼 전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4)옹기 굽던 마을

지금(2026년)으로부터 약 40~50년 전만 해도 합천 이씨 등 외지에서 들어온 장인들이 모여 옹기 가마(옹기굴)를 크게 운영했던 마을이다. 낙동강 변의 질 좋은 흙으로 만든 박진마을의 옹기는 나루터를 통해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현재는 가마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는 1990년대 말 박진교(다리)가 건설되고 강변 제방 공사가 진행되면서 옛 나루터와 상당수 마을 가구의 옛 정취는 사라졌지만, 낙동강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우리 역사의 뜨거운 흔적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의미 깊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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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반 한지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新繁里)를 중심으로 전승되어 온 '신반 한지(또는 의령 한지)'는 조선 시대부터 전국 한지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을 정도로 명성이 자고했던 우리나라 전통 한지의 대명사이다.

(1)한지의 최적지, 신반

의령군 봉수면 국사봉 기슭의 대동사(절)에서 한지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설화가 있을 만큼 의령은 한지의 오랜 본고장이다.

특히 봉수면 서암마을에서부터 부림면 신반리, 유곡면 마두마을로 이어지는 유역은 신반 한지가 탄생하기에 완벽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양질의 닥나무: 한지의 주원료인 참닥나무가 산자락에 지천으로 자생했다.

2)맑고 깨끗한 수질: 한지를 제조할 때 닥나무 섬유질을 씻어내고 물을 빼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겨울에도 얼지 않고 맑게 흐르는 신반천과 유곡천의 깨끗한 물이 종이의 빛깔을 희고 투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2)신반 한지만의 독특한 가공법: 도침(搗砧)

신반 한지가 조선 시대 왕실 진상품과 선비들의 과거 시험지, 고급 장판지로 사랑받았던 이유는 특유의 밀도와 윤기 때문이다.

한지를 여러 장 겹쳐 놓고 디딜방아나 뜸방망이로 무수히 두드리는 '도침' 가공법을 사용했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 종이 표면의 잔털이 가라앉고 섬유가 촘촘하게 맞물리면서 훨씬 깃 질기고, 먹물이 번지지 않으며, 표면이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는 명품 종이가 탄생했다.

(3)전국으로 유통되던 교통의 중심

과거 부림면 신반리는 큰 시장(신반장)이 서던 중심지였다. 이 일대 가마와 냇가에서 생산된 한지, 그리고 신반 장판과 병풍 등은 앞서 말한 부림면 박진나루터로 모였다. 박진나루에 들어온 돛배들을 통해 낙동강을 타고 부산 구포나 대구, 멀리 한양까지 전국 각지로 유통되었다. 이 때문에 전국 한지 유통업이나 도배 업계에는 의령(특히 신반) 출신 인물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4)현대의 신반 한지: 전통 계승과 친환경 섬유 변신

1)국가무형문화재 장인의 숨결: 값싼 중국산 종이와 기계지에 밀려 많은 공방이 문을 닫았지만, 의령에는 최고령 전통 방식을 고집하며 명맥을 이어온 신현세 한지장(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 보유자) 등이 있어 로마 교황청의 고문서 복원 용지로 신반 한지가 채택되는 등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현대적 변신(한지 섬유): 최근에는 전통 한지를 얇게 썰어 실로 꼬아 만든 '한지 섬유(닥나무 섬유)'를 개발하여 친환경 속옷, 양말, 의류 등을 생산하는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도 변신을 꾀하고 있다.

3)문화 축제: 부림면 신반리 일원에서는 매년 가을마다 의령의 양대 문화 자산인 한지와 우륵의 가야금을 테마로 한 '의령 신반한지우륵문화축제'가 열려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4. 낙서면

낙서면은 낙동강 서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강을 끼고 있어 기름진 토지와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아담하고 평화로운 농촌 지역이다.

(1)전화리 (前花里)

전화(前花) / 밧꽃: 마을 앞쪽에 꽃이 만발하는 형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의령군 낙서면 전화리(全火里)에는 면사무소와 우체국 등이 위치한 낙서면의 중심지답게 다음과 같은 여러 자연마을(뜸)들이 형성되어 있다.

(2)전화리의 자연마을

전화리는 과거에 오운, 부곡, 방계마을을 묶어 '전화리 3대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1)방계(芳桂)마을: 웃방계(고촌)와 중심지인 아랫방계 두 뜸으로 나뉜다.

낙서면사무소가 위치한 전화리의 중심이자 낙서면의 면소재지 마을이다. 옛날에는 강변 모래가 고와서 방사(芳沙)라고도 불렀으며, 풍수지리에 따라 동구 밖에 계수나무 등을 심은 후로 방계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2)오운(五雲)마을 / 운곡(雲谷)

'경산 김씨, 선산 김씨, 벽진 이씨, 담양 전씨, 경주 최씨'의 다섯 성씨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정착한 마을이라 하여 오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등록문화유산인 '의령 오운마을 옛 담장'과 문화재인 '칠우정', '운곡재' 등이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한 역사 깊은 마을이다. 칠우정(七友亭)', '운곡재(雲谷齋)' 같은 전통 재실과 한옥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다.

3)부곡(釜谷)마을 / 가마골

방계, 오운마을과 함께 전화리를 이루는 주요 마을 중 하나이다. 지형이 가마솥(釜)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곡 또는 가마골이라 불린다.

4)신전(新田)마을 / 새터

전화리 구역 내에 새로 터를 잡고 밭을 일구어 생겨난 마을이라는 뜻의 자연마을이다.

5)지명 이야기:

전화리의 '전화'는 통신 수단인 전화기(電話)가 아니라, 옛날에 낙동강물이 자꾸 범람하자 물과 상극인 불 화(火) 자를 지명에 써서 재난을 막아보고자 했던 풍수적 비보책에서 유래한 이름(全火)이다.

'오운(五雲)'이라는 한자 이름이 경상도 방언의 구전 과정과 결합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오니' 또는 '오내마을'로 굳어졌다. 실제로 오운마을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오니', '오니마을'이라는 정겨운 속칭을 훨씬 더 자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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