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7. 15:53ㆍ寄稿
(2006.01.12, 403)
우선 이곳은 연로하신 족장들께서도 들르시고 아래로는 계대가 낮은 일가들도 들르는 모든 종중 원들이 함께하는 우리 문중의 장이라는 점을 항상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자신의 지파, 계대를 밝혀 쓰면 매우 좋았겠지만 적어도 이름 석 자라도 정확하게 밝혀 예의를 갖추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상고시대의 역사는 기록과 유물에 의존하고 또한 그 기록이 일실된 예가 많아서 현전한다 하더라도 그의 상징성으로 인하여 현대의 기계적 사고의 준거로는 불합리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리라 판단됩니다.
한편 족보(族譜)는 다른 말로 보첩(譜牒)이라고도 하며 그 효시는 중국의 6조(六朝) 시대에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처음이며 우리나라는 고려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18대왕 의종(毅宗)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체계적인 족보의 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성종(成宗)때(1476) 부터이며, 이때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가 처음 발간된 것으로 보아 상고시대에는 족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후세에 상계를 각 문중의 기록이나 역사의 기록에 의존하여 추정하여 기록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었으며 당연히 우리 시조할아버지에 관한 기록도 현전하는 역사의 기록에 의존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문중뿐만 아니라 다른 문중의 상대의 계대는 이러한 저변의 사정을 모르고 단순한 기계적 사고로는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조국신화(肇國神話)인 단군신화는 물론이요, 삼국의 건국신화도 말할 것도 없고 외국의 모든 건국신화가 그 상징성과 신성성으로 인하여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설화문학의 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역사도 광범위하게는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역사라는 것도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되기도 하기 때문에 학문으로서의 존재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에 우리 배문의 본관은 그동안 각 분파별로 흩어져 있던 것을 문양공(文讓公) 諱 지타(祗沱)할아버지로의 후손이란 전제하에 경주로 통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가 써오던 각 분파의 관향은 본관 경주의 하위 개념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각 파별로 내려오는 현재의 세계는 시조이신 문양공(文讓公) 諱 지타(祗沱)할아버지로부터 기세한 것이 아니고 각 분파별(이전의 관향별)로 중시조이신 고려개국통합원훈시호무열증태사(高麗開國統合元勳諡號武烈贈太師)이신 諱 玄慶할아버지로부터 기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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