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8. 18:25ㆍ文化
1992년 개성에서 출토된 태조상은 발굴 당시 옷이 입혀졌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올해 초 한국 전시가 결정되자 국립중앙박물관도 의복을 제작해 입힐 계획이었으나 북측과 합의를 이루지 못해 비취색 비단으로 가려놓기로 결정했다.
북에서 온 국보급 문화재인 고려 태조 왕건상을 둘러싼 궁금증이 풀렸다.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왕건상(王建像)의 상징적 의미를 풀이했다. 노 교수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제작된 왕건 동상은 당시의 전통문화인 국풍(國風)을 바탕으로 영웅 숭배의 전통을 좇아 나체상으로 만든 것"이라고 7일 밝혔다. 왕건상(王建像)이 쓰고 있는 관은 황제를 상징하는 통천관(通天冠)으로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가를 자부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왕건상(王建像)은 13일부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전에 선보인다. 고려사를 전공한 노 교수는 2005년 11월 개성역사박물관 방문 때 북쪽 학자들과 왕건 동상을 공동 조사한 데 이어 최근 이번 전시의 자문위원으로 왕건 동상을 정밀 재조사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노 교수는 "제왕의 초상으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왕건상(王建像)의 나체상 양식은 민간의 토속신앙에서 신성시되던 동명왕상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왕건상(王建像)이 쓴 통천관은 중국 진나라에서 시작돼 형태가 변화하다가 당(唐)나라 무덕(武德) 4년(621) 공포된 거복령(車服令)에서 제도화된 '24량(二十四梁) 통천관'이라 설명했다. 다만 관에 붙은 8개 일월(日月)을 상징하는 원형 형상은 중국 황제의 통천관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첫 공개 당시 천으로 덮여 있던 배 부분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노 교수는 "왕건상(王建像)이 앉은키는 84.7cm(의자 면부터 외관 중간까지의 높이)로 성인 남자와 비슷한 크기인 데 반해 남근은 길이가 2cm로 유아의 것처럼 표현된 것은 불교의 영향"이라고 강조했다.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 왕건상(王建像)의 발바닥을 비롯한 신체의 특징 10여 곳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32대인상에 해당하는 특징이 발견됐다.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북녘의 문화유산전’.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급 유물 90점을 선보이는 이 전시회에서 유독 한 유물 앞에만 관람객들이 북적거린다. ‘고려 태조상(高麗 太祖像·사진)’이 그 주인공. 1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태조 왕건의 나체를 다룬 보기 드문 동상이란 점에서 전시 이전부터 화제가 됐다.
막상 전시장에 선보인 왕건좌상의 하반신은 천으로 덮여 있다. 그래서 더욱 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부 관람객은 특히 제왕의 벗은 몸에 대해 노골적으로 궁금증을 드러낸다.
도록을 보면 왕건좌상의 ‘주요 부위’인 ‘옥경(玉莖)’은 매우 작게 표현돼 있다. 왕건상의 앉은키는 84.7cm로 성인 남자의 앉은키와 비슷하지만 옥경은 불과 2cm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대 노명호(국사학) 교수는 “남근의 불교적 표현으로 색욕을 멀리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몸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어떨까? 동국대 오병욱(미술학) 교수는 “다비드의 남근은 실제 크기보다 크게 했다거나 줄였을 가능성이 적다”며 “서양 미술은 미학을 완벽한 몸의 비례, 균형에서 찾았기 때문에 몸 크기에 적절하고 아름다운 비율로 성기를 표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현종 고고부장은 “한국인에게 상(像)은 종교적으로 신성시되거나 왕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경건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서양의 나체 조각상과 다르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고려 태조상을 대여해 준 북한 조선중앙역사박물관도 “왕건 전라상(全裸像)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500년 만에 나신 드러낸 왕건 청동상의 비밀은 …
노명호 서울대 교수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 출간
563년 만이었다. 조선 세종 11년(1429년) 지하에 파묻혔던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1992년 10월 개성 현릉(고려 태조 왕건릉) 인근이었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대대적인 현릉 확장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공사 도중 느닷없이 발굴된 그의 모습에 북한 학자들은 의아해했다. 동상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는데, 유난히 큰 귀와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학자들은 넘겨짚었다.
“고려시대 불상(佛像)이로군.”
그런 줄만 알았다. 개성 고려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동상은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청동불상’으로 불렸다.
그 즈음 남쪽에 이 동상에 관심을 나타낸 학자가 있었다.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다. 노 교수는 97년 한 신문에서 그 동상을 봤다. 고려사에 정통했던 그는 직감했다.
“세종 때 파묻혔다는 고려 태조의 동상이 아닐까.” 노 교수의 직감은 옳았다. 당시로선 북한에 갈 수 없었으므로, 그는 신문에 실린 두 컷의 사진을 근거로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불상이 아니라 태조 왕건의 동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고려 태조 왕건 동상은 고려 왕실의 제례용 상징물이었다. 현재 얼굴과 귀 등에 살구색 안료가 남아있는데, 채색까지 마친 온전한 동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지식산업사]
노 교수는 2005년이 돼서야 왕건 동상을 직접 볼 수 있었다. 2003년 남북역사학자 학술회의 이후 세 번째 방북했을 때였다.
현릉 현실에 보관 중인 동상을 보고 그는 흥분했다. 육안으로 동상을 확인한 뒤 그는 본격적으로 왕건상을 연구했다. 그리고 왕건 동상의 비밀을 꼼꼼히 정리한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지식산업사)를 펴냈다. 동상 조성 1000여 년 만에 그 신비스런 비밀이 풀리게 된 셈이다.
◆ 새로운 군주의 위상
왕건은 26년간 재위하고 943년 67세로 사망했다. 그는 후삼국 시대의 무질서를 매듭짓고, 새로운 시대를 연 영웅이었다.
그 영웅이 죽자 고려인은 동상을 만들어 통치 이념을 계승하고자 했다. 해서 동상은 노년의 모습이 아니다. 힘과 권위가 충만한 장년의 모습이다. 실제 동상은 의자에 앉았을 때 길이가 138.3㎝로 실제 성인의 앉은키와 비슷하다.
▲ 왕건 전신상(길이 138.3㎝)
왕건상은 제례용 상징물이었다. 그런데 나신(裸身)이다. “인접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다.
출토 당시 왕건상에는 비단 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벌거벗은 왕건상에 황제의 의복을 입혀 제례에 임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더구나 머리에는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이 조각됐고, 금제 장식의 옥대(玉帶)도 함께 발견됐다. 노 교수는 “왕건 동상에는 황제제도를 중심으로 한 유교정치문화가 형상화돼 있다”고 했다.
벌거벗은 왕건상에는 남성 성기까지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런데 남근의 길이가 2㎝에 불과하다. 황제의 위엄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노 교수의 해석은 흥미롭다. “색욕을 멀리함으로써 성취한 불교의 마음장상(馬陰藏相·말의 오그라든 남근)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수양과 덕을 쌓은 군주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 성기 부분을 확대한 사진. 색을 멀리했던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실제 왕건상은 얼핏 불상을 닮았다. 불교의 32상(부처가 몸에 지니고 있는 32가지 모습)이 곳곳에 숨어있다. ▶평평한 발바닥▶가늘고 긴 손가락▶사각형에 가까운 발 모양 등이다. 고려의 통치 철학이었던 불교적 세계관이 담긴 모습이다.
◆ 왕건상의 흥망성쇠
왕건상은 고려 시대에는 국가적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조선이 들어서자 경기 연천의 초라한 사당으로 옮겨졌고, 세종 때 땅에 파묻기에 이른다. 고려 시대와 단절하고, 유교적 제례의식을 확립하려는 조선 왕조의 정책이었다.
그렇게 563년간 파묻혔던 왕건상은 출토될 당시에도 참혹한 일을 겪었다. 북한 학자들의 발굴 작업이 아니라, 공사 도중 굴삭기에 걸려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노 교수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굴삭기에 걸린 동상은 오른쪽 다리가 부서지고, 곳곳이 찌그러졌다. 훗날 북한 당국이 다리를 용접했다. 동상에는 천 년에 걸친 왕건상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항변하듯, 수리된 흔적이 남았다.
◆ 왕건상
고려 광종 2년(951년)에 제작됐다. 고려·조선 왕조를 통틀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임금 동상이다. 2006년 6~10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린 ‘북녘의 문화유산’ 전시에 공개됐었다.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230/7694230.html?ctg=1700&cloc=joongang|home|newslist1 정강현 기자 foneo@joongang.co.kr 입력 2012.03.23 00:05 / 수정 2012.03.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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