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Pop art)란?

2009. 11. 28. 18:34文化

 

 andy warhol(1928.8.6.~1987.2.22.)

 

▲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作, 91×91㎝, 종이, 실크스크린,1967.

 

 

▲ marilyn by andy warhol

팝아트란?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화단을 지배했던 구상회화의 한 경향. '팝POP' 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포퓰러 Popular' 의 약자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즉 통속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일상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의 이미지에서 제재(題材)를 취했던 이 경향의 특징은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팝아트가 급속히 일반화 된 것은 1962년 뉴욕의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열렸던 '뉴 리얼리스트 전' 이 후의 일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 전조(前兆)가 된 예술활동이 있어 왔다. 즉 1950년대 초부터 리처드 해밀튼, 애두아르도 파올로치 등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대중 사회의 문화, 예술, 매스 미디어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고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서 팝아트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비평가 로렌스 알로웨이 였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 명칭은 이미 1950년대 초에 런던의 소그룹 예술가들 사이에서 쓰여왔다는 것이다.

호세 피에르 (jose pierre)나 스웬슨 (swenson), 그리고 샘 헌트(sam hunt) 같은 이들은 팝아트를 근본적으로 '미국적인 미술' 이라고 보고 있다.

세계가 1, 2차 대전으로 온통 폐허가 되어 있을 때 미국은 고도한 기계·기술 문명의 발달을 향유하고 있었으며, 일본을 굴복시킨 이후 경제·과학·군사에서 뿐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 이제는 미국의 것만은 아니었다. 미국 중심의 이러한 무드가 최고조에 달했던 1950-1960년대 서구가 전쟁의 복구에 여념이 없을 무렵에 미국적 문명은 거부 반응 없이 서구에 잘 수용되고 있었다. 거부보다 오히려 민감하게 서구인에게 어필하고 있었다. 팝아트는 이러한 기간 동안 1950년대를 전후한 10-12년간에 히트를 친 미국적 미술 현상이다.

팝아트는 처음에 미국보다 영국에서 먼저 시동이 걸렸다. 팝아트란 이름도 미술 평론가 앨로웨이 (lawrence Alloway)에 의해 1954년에 처음 써지고 있다. 그는 집단광고 문화(adnass cultuve)에 기인한 '대중미술(Popular art)'을 지칭하기 위해 썼고, 이에 1962년에 대중적 이미지(Popular image)를 구사하는 순수미술가들의 활동을 논하기 위해 확대하여 사용했다. 당시 그의 필적한 만한 여러 가지 명칭들도 있었고, 일부 팝 작가들 자신들은 그 '팝아트' 란 말에 거부적 태도를 취했지만, 이제는 모두 그렇게 부를 만큼 일반화되어 버렸다.

Marilyn Monroe

 

◀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년 6월 1일 ~ 1962년 8월 5일)는 미국의 헐리우드 여자 배우로, 역대 가장 유명한 여배우 가운데 한 사람이다.

메릴린 먼로는 노마 진 모르텐슨이란 이름으로 아버지 마틴 에드워드 모르텐슨과 어머니 글레디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녀의 어린 시절은 불행하기 그지없어서 아버지 마틴은 가정을 버렸고, 어머니 글레디스는 우울증 환자였다. 결국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 양부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지만, 여전히 보육원과 고아원을 전전해야하는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마릴린은 16세에 양부모에 의해 짐 도허티와 결혼했지만, 4년 후인 1946년 이혼했다. 1944년부터 사진모델로 일하던 그녀는 20세기 폭스와 콜럼비아 영화사에서의 단역배우를 시작으로 나이티드 아티스트사의 1949년 작 《러브 해피》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후 마릴린은 1950년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인 《아스팔트 정글》과 《이브의 모든 것》을 비롯한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는 인정받았지만, 결혼생활은 야구배우 조 디마지오,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행복하지 않았다. 또한 마릴린은 진보적인 정견을 갖고 있었고, 지인 중에도 현재 또는 과거의 미국공산당의 당원들도 있어서 멕시코 여행당시 행동들이 보고서에 기록, 당시 FBI국장이었던 에드거 후버에게 제출될 만큼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1962년 8월 5일 사망했으며, 사인이 수면제 과다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멈추지 않고 있다.

팝 아트(Pop art)

1950년대 후반부터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나타난 예술 현상.

팝 아트라는 명칭은 미술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가 이 경향의 회화와 조각의 서술적인 표현양식에 대하여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 영국 팝 아트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인 리처드 해밀턴에 의하면 팝 아트는 "통속적이고, 일시적이고, 소비적이고, 값싸고, 대량생산적이며, 재치 있고, 관능적이고, 선동적이고, 활기차고, 대기업적인…… 미술 양식"이다. 특히 미국의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클레이즈 올덴버그, 톰 웨셀먼, 제임스 로젠퀴스트, 로버트 인디애나, 영국의 데이비드 호크니, 피터 블레이크 같은 팝 미술가들은 작품에서 현대생활에 강한 충격을 주는 대중문화의 모든 현상을 가리지 않고 특징적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담지 않고 노골적·직접적으로, 또한 그림 자체를 있게 한 매스 미디어에서 사용된 정확한 상업적 기법을 수단으로 도상학적인 측면(텔레비전이나 만화책, 영화, 잡지 및 모든 형태의 광고에서 고안됨)을 뚜렷하게 객관적으로 드러냈다. 미국과 유럽에서 매우 개인적인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물결이 가라앉을 무렵 팝 아트는 보다 객관적·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미술 양식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과거의 순수예술이 주장하는 우월성과 당대의 전위미술에서 볼 수 있는 허식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전통을 파괴했다. 팝 아트는 특정한 사회적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했으며 매스 미디어에 의해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했기 때문에 문화적인 대사건이 되었다. 통속적·선정적·반미학적인 대사건이 농담으로 평가되어왔지만, 생활에 직접 반응하는 미술, 즉 전문가와 훈련받지 않은 관람자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민주적·비차별적인 미술로서 평가되었다.

팝 아트는 당대의 파리풍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진지함과 좀더 넓게는 유럽에 전쟁을 몰고 온 정치적·문화적 상황을 조롱한 1920년대의 허무주의 운동인 다다이즘의 후예로 볼 수 있다. 당대의 대량생산물을 찬양함으로써 미술과 생활의 간격을 좁히려고 한 미국 다다이즘의 대표자인 마르셀 뒤샹은 팝 아트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팝 아트에 영향을 준 다른 미술가로는 스튜어트 데이비스, 제라드 머피, 페르낭 레제 등이 있는데 이들은 기계공업시대의 정밀하고 대량생산적·상업적인 물건을 그렸다. 직접적인 선조로는 1950년대에 비록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기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깃발과 맥주깡통 등을 그린 미국의 미술가 재스퍼 존스, 래리 리버스, 로버트 로젠버그 등이 있다.

특히 인상적인 작품으로는 상업 인쇄물에서 사용하는 색점에 이르기까지 연속만화를 충실하게 복제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과 수프 깡통의 상표와 비누 상자, 나란히 배열된 청량음료병을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그리거나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찍어낸 앤디 워홀의 작품, 욕실의 붙박이 설비와 타자기 또는 거대한 햄버거 등을 부드러운 플라스틱재로 제작한 클레이즈 올덴버그의 작품, 얼굴 없는 인물의 섹스 심볼을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린 톰 웨셀먼의 〈미국의 거대한 누드 Great American Nudes〉, 그리고 폐품처리장에서 주워온 실제의 환경물(간이식당의 식탁과 버스 등)에 실물 크기의 석고 인물을 설치한 조지 시걸의 구조물 등이 있다.

대부분의 팝 미술가들은 작품에서 비개성적·도시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그러나 미묘한 표현으로 사회를 비판한 것도 있는데 예를 들면 올덴버그의 늘어진 오브제와 워홀의 똑같은 평범한 이미지의 단순한 반복은 명백히 혼란스러운 효과를 일으킨다. 시걸 작품의 신비하고 고독한 분위기는 공공연하게 표현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상징적·익명적·공격적인 반면 영국의 팝 아트는 주관적·직접적이며 그들로서는 비교적 거리감이 있는 팝 문화에 대해 다소 낭만적인 태도를 보인다. 영국의 팝 미술가들은 주로 과학기술과 대중문화를 다루었는데 미국의 몇몇 팝 미술가들은 이러한 생각을 직접 실천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워홀은 "나는 모든 사람이 일종의 기계라고 생각한다"라는 것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으며 실제 작업에 있어서도 기계가 하듯 작품을 제작하려고 노력했다. 팝 아트는 일반대중에게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20세기 중반 서양의 산업국가에서 발생한 매스 미디어와 고도의 산업사회에 적합한 대표적인 미술양식으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팝 미술가들이 스스로 내건 목표는 바로 생활과 구별할 수 없는 미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출처: 브리태니커

 

▲ 〈Brillo Box〉(1964년)

작가 : Andrew Warhola(1928.08.06.~1987.02.22.)

설명 : 목판 위에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

출처 : By courtesy of Leo Castelli Gallery, New York City

 

▲ <Happy Tears> (1964년)

작가 : Roy Lichtenstein(1923.10.27.-1997.09.27.) 유명 광고나 만화책에서 이미지를 차용

설명 : 캔버스에 마그나, 38*38 inch, 2002년 11월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715만$에 낙찰

출처 : 서미갤러리, 서울

 

▲ <입맞춤> (1962년)

작가 : Roy Lichtenstein(1923.10.27.-1997.09.27.)

설명 : 캔버스에 유채, 80*68 inch

출처 : 폴 알렌 컬렉션 소장

■ 작가 : Roy Lichtenstein(1923.10.27.-1997.09.27.)의 다른 작품들

출처 : http://cafe.daum.net/Retreat/4Kh9/564

 

 

 

 

Happy Tears

 

 

▲ 1일 서울 가회동 서미갤러리에서 열린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0.27.~1997.9.29.)의 '행복한 눈물' 공개에서 작품이 공개되고 있다. 오늘 공개는 그동안 논란이 된 삼성그룹의 미술품 비자금 의혹을 해소하기위해 삼성그룹이 아니라 서미갤러리 홍송원대표가 '행복한 눈물'을 보관 중인 점을 확인하기위해 열렸다. / 연합뉴스

'행복한 눈물’(1964년작)은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만화 이미지를 확대한 가로·세로 96.5㎝의 회화다. 홍 대표는 2002년 11월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의 현대미술 이브닝 세일에서 이 작품을 715만9500달러(당시 환율로 약 86억5000만원)에 낙찰 받았다. 지금은 3~4배 정도 값이 오른 것으로 미술계는 보고 있다. 이 작품은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만화 이미지를 확대한 가로ㆍ세로 96.5㎝의 회화

최명윤 교수 "'행복한 눈물' 좋기는 좋더라.", 홍송원 대표 소유라면 평가이익 300만달러

’삼성비자금’ 특검팀과 함께 1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행복한 눈물’에 대해 확인 작업을 벌인 과학감정 전문가 최명윤 명지대 교수는 작품을 본 인상에 대해 “좋기는 좋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국내에 한 점 정도 있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며 “특히 행복한 눈물을 비롯한 1964년 작들은 리히텐슈타인의 그림 중에서도 높은 가격이 형성되는 시기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행복한 눈물’은 미국의 팝아티스트인 리히텐슈타인의 특징이 잘 드러난 대표작 중 하나로,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가 지난 2002년 11월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715만9천500달러에 구입했으나 실제 구매자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씨라는 주장이 김용철 변호사에 의해 작년 11월 제기됐다.

리히텐슈타인은 대중만화를 소재로 그래픽 같은 단순하고 뚜렷한 윤곽선을 사용해 그림위에 망점을 넣는 작품을 만들어 왔는데 이 작품 역시 만화 속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했으며 원화 속 여자의 머리만 검은 색에서 붉은 색으로 변화시켰다.

 

최 교수는 현재 이 작품의 해외 추정가가 1천만 달러를 다소 상회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홍 대표의 주장대로 그가 소유한 작품이 맞는다면 5년여 만에 300만 달러(28억 상당)에 가까운 평가이익을 본 셈이다.

 

최 교수는 이날 확인 작업과 관련, “특검팀의 요청을 받아 이뤄진 것이며 보관 장소는 모른다.”고 밝히고 “경매 당시 크리스티가 배포했던 카탈로그의 사진과 함께 공식적으로 개최된 과거 전시회 도록의 사진이나 레조네(분석적 작품총서) 등 6-7건의 자료를 동원해 감정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확인 결과, 크리스티를 통해 경매됐던 작품이 맞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입력 : 2008.02.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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