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9. 13:01ㆍ人間
촛불 가득한 6월 어느 날… 9개월 세희는 미국에 입양됐다
"미국 국적 갖게 된 세희, 한국인으로 당당히 키울 것"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동방사회복지회 본관 2층 대기실에 어른 셋과 한 아이가 모였다. 아이는 생후 9개월 된 세희, 어른은 세희를 입양하러 미국에서 온 크리스 버자스(36)·테라 버자스(32) 부부와 세희를 여덟 달 동안 맡아 키워준 위탁모(委託母) 이경묵(50)씨다.
위탁모 이씨는 아이의 등을 새 부모에게 떠밀었다. 새 부모는 아이와 친해지려는 듯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양팔도 활짝 벌렸다. 아이는 새 부모와 지금까지 키워준 두 번째 어머니 사이를 오가다 울음을 터뜨렸다. 2008년 6월 5일 오후 2시 벌어진 광경이다.
아이가 위탁모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자 동방사회복지회 직원이 세희를 새어머니 등에 업혔다. 아이는 계속해서 위탁모만 바라봤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새어머니를 따라간 아이는 울다 잠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울던 위탁모는 새 아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그날 세상은 촛불로 떠들썩했다. 버스업계는 요금을 안 올려주면 운행을 감축하겠다고 했다. 항공업계는 국내선 항공료를 20% 인상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율 규제방안을 발표했다. 2만 명은 72시간 연속집회를 하겠다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태극기가 거리를 뒤덮고 온 나라가 검역주권, 건강주권을 외치던 날, 한국인에서 미국인으로 신분이 바뀌게 될 세희를 눈여겨본 이는 많지 않았다. 지금 이 시대에 한국은 어떤 존재이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 창천동의 세 주인공 이야기를 자필 수기(手記) 형태로 정리해봤다.
9개월 동안 어머니만 세 번 바뀐 세희
제 이름은 세희입니다. 저는 태어난 곳도, 누가 저를 낳아줬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태어난 지 한 달 반 만에 동방사회복지회에 맡겨진 사실만 알 뿐입니다. 당연히 제 성(姓)이 김씨인지 박씨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제 어머니는 미혼모(未婚母)였다고 합니다. 제 어머니가 왜 미혼모가 됐는지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복잡한 사연이 있었겠지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저는 오늘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 서대문구 창천동 동방사회복지회 본관을 떠나게 됐습니다.
6월 5일 오후 2시, 저의 세 번째 아버지,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새아버지는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이었습니다. 새어머니는 저와 얼굴이 비슷했고 머리 색깔도 검었습니다. 그분들이 오자 8개월 동안 저를 키워준 두 번째 어머니가 자꾸 제 등을 떠밉니다.
저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유일한 말만 반복했습니다. '엄마, 엄마…'라고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저를 사랑해주고 제게 밥을 먹여주셨던 두 번째 어머니는 자꾸 저를 외면하기만 합니다. 눈에는 슬픔이 가득한 채로요.
새아버지는 커다란 곰 인형을 가져왔습니다. 예쁜 인형이었습니다. 제게 줄 선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 인형을 안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그 인형을 만지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았거든요. 두 번째 어머니는 그런 저를 보고 "새아빠야, 가봐 가봐"라고 했지만 저는 가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세 번째 어머니가 저를 포대기에 안고 어디론가 떠났거든요. 두 번째 어머니는 제게 많은 선물을 주셨어요. 과자와 바나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요플레까지. 동네에서 5만원 주고 한복까지 사주셨어요. 생일 때 입으라고요. 돈도 없으실 텐데….
입양아에서 입양모된 테라 버자스
동방사회복지회 여러분, 세희를 키워주신 이경묵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세희가 처음에는 계속 울었지만 저녁 7시부터 잠이 들었어요. 첫 번째 한국에서 입양한 알렉스는 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 6시간을 내리 울어댄 대단한 녀석이었는데 세희는 의외로 착하네요.
제 이름은 성아영, 1976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됐어요. 제 양아버지는 주한미군 출신이고 어머니는 사회복지사였어요. 제 양부모들은 오빠 토드와 제레미도 한국에서 데려왔어요. 우리 가족은 전부 미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 미시간주 그랜래피드에서 자랐습니다. 2002년에 회계사인 남편 크리스 버자스(36)와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렸어요. 지금은 시카고 북쪽에 있는 에반스톤에서 살고 있죠. 저는 병원에서 인사 담당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입양아였기 때문에 제가 태어난 문화권에서 아이를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남편 크리스도 찬성했어요. 2007년 8월 생후 6개월 된 알렉스를 입양해온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너무 흥분됐고, 저를 데려올 때 제 미국인 부모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딸을 갖고 싶었는데 이번에 소원을 이루게 됐습니다. 너무 영광스럽다는 말이 한국식 표현으로 맞나요? 세희의 이름은 에나벨 세희로 정했어요. 저는 세희가 한국 출신이고 입양아임을 알려줄 겁니다. 남편도 제 마음을 이해하고 이름 가운데 한국 이름을 꼭 남기자고 했어요.
저는 세희가 미국 국적을 갖더라도 그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제 스스로 깨달았고 제 부모님도 제게 그렇게 해주셨거든요.
아! 여러분은 저희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세희와 알렉스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신가요?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친자(親子)를 가져도 그만, 안 가져도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으니까요.
2002년부터 친구 권유로 버려진 아이들을 키웠어요. 세희가 열 번째 해외입양 보내는 아이입니다.
세희를 처음 만난 건 작년 10월이었어요. 그때 세희는 생후 한 달 반 된 핏덩어리였어요. 오늘 아침, 마침내 이별의 날이 왔습니다. 저는 아이의 젖병과 옷가지를 챙겼습니다.
세희는 산토끼, 뽀뽀뽀, 곰 세 마리 노래만 불러주면 새근새근 잘 자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아이 앞날을 생각하면 여기보다 미국으로 보내는 게 훨씬 낫지요. 분명 기쁜 일인데 자꾸 눈물이 납니다. 벌써 열 번째 이런 경험을 하는데도 주책없이….
저 같은 사람을 위탁모(委託母)라고 한다죠. 쉽게 말해 입양하는 가정이 나올 때까지 아기를 제 집에서 맡아 키우는 일입니다. 주위에서는 이런 일 하는 저를 모두 바보라고 해요. 왜 하느냐고 모두가 말리지만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어요.
제 남편은 이발소를 하고 있어요. 청각장애 4급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울어도 별로 화내지 않아요. 남편은 괜찮다지만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처음 아이를 입양 보내고 20일을 울었어요. 그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너무 눈에 밟혀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제일 기억나는 녀석은 두 번째 아이였어요. 발달장애가 있었는데 1년9개월을 데리고 있었죠. 2005년 10월에 미국 몬태나주로 입양 갔는데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입양해간 부모가 사진이라도 자주 보내줬으면 좋으련만.
제가 보낸 아이들의 부모가 1년에 한두 번씩 편지와 사진을 보낼 때가 제겐 제일 기쁜 날입니다. 세희도 머지않아 제게 소식을 전해오겠죠. 저는 세희를 보내고 다시 새 아기를 집으로 데려왔어요. 정(情)을 이 아이에게 붙이지 않으면 세희가 생각나 못 견딜 것만 같거든요.
이들을 하루 종일 따라다닌 기자
세희가 테라와 만난 지 50분 정도 지나자 진행하던 사회복지회 직원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빨리 진행할게요"라고 했습니다. 제 눈에는 그 직원이 매몰차 보였지만 설명을 듣고 이해하게 됐습니다. 아이가 새 가족에 적응하려면 위탁모와 아기가 빨리 헤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잠시 후 지팡이를 짚은 양복 차림의 노(老)신사가 나타났습니다. 동방사회복지회를 만든 김득황(93) 이사장입니다. 1972년 사회복지회를 설립한 후 작년까지 그가 국내외로 보낸 입양아가 4만 5000명이라고 합니다. 김 이사장은 이날도 아이에게 기도를 해줬습니다. "가서 행복하게 잘 살아라…."
기도를 마친 후 다 함께 기념사진 찍는 동안 위탁모 이경묵씨가 참아오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희는 사진촬영 후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 이씨 쪽으로만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셔터를 눌러대는 저의 손도 떨렸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테라가 이씨를 두 팔로 안으며 말했습니다. "제 아이를 이렇게 예쁘게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꼭 행복하고 예쁜 아이로 키우겠습니다."저는 그 부부가 약속을 꼭 지키리라고 믿습니다. 아이가 사라진 뒤 위탁모 이씨는 통곡했습니다.
저는 원래 다른 취재가 있었지만 공항까지 세희를 따라갔습니다. 세희는 한참을 울다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아이를 새어머니 테라는 한참이나 안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문득 작년에 처음으로 국내 입양 수가 해외입양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기억났습니다. 하지만 해외 입양이 아이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헌신(獻身)의 개념으로 이뤄지는 데 비해 국내 입양은 불임(不妊) 부부가 여전히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를 고를 때 해외 입양은 신체장애의 유무(有無)를 가리지 않는 데 비해 우리는 부모와 비슷한 생김새를 선호하고 혈액형을 따진다고 합니다. 한참 키우다가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파양(破養)하는 일도 잦다고 하네요. 그러면 그 아이는 다시 어떻게 될지…. 한밤이 돼 저는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거리는 시민들과 시민들이 손에 쥔 촛불로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0/2008062001092.html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입력 : 2008.06.20 16:24 / 수정 : 2008.06.21 1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