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7. 13:57ㆍ政治
[이정재의 시시각각] ‘미생의 약속’과 ‘증자의 돼지’
오래된 유머 한 토막. 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미국인 선교사가 조선 교회를 찾았다. 한창 설교 삼매에 빠진 목사님, 난데없이 공자님을 들이댄다. 공자 가라사대…. 선교사는 쯧쯧,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사님은 다시 또 공자 가라사대…. 화가 난 선교사, 설교 끝난 목사님께 따졌다. “예수님 말씀, 더 좋은 거 많은데 왜 공자님만 찾나.” 목사님 하는 말 “예수님 말씀, 한국사람 잘 모른다. 공자님 말씀, 유식해 보이고 잘 먹힌다.”
‘공자님 말씀’이라고 모두 약발이 듣는 건 아니다. 과하거나 잘못 쓰면 독이 되기도 한다. 특히 잘 모르는 한자나 사자성어를 섞다 보면 시쳇말로 ‘뻑’이 나기 쉽다. 요즘 여당의 고사성어 논쟁이 딱 그렇다. 포문을 먼저 연 건 정몽준(MJ) 대표다. ‘미생의 약속(尾生之信)’을 들고 나왔다. 박근혜 전 대표는 ‘증자의 돼지(曾參烹彘)’로 막았다. 공교롭게도 미생과 증자는 공자와 특수 관계인이다. 미생은 공자가 잘 아는 고향 후배고 증자는 공자의 수제자다.
MJ는 미생을 “약속은 지켰지만 고지식하다”고 했다. ‘목숨을 버려 얻은 게 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종시 원안 고수를 주장하는 박근혜를 미생에 빗댔다. 장자가 미생을 ‘어리석은 놈’ 취급한 데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하기야 공자도 미생을 ‘믿지 못할 놈’으로 여겼다. 한동네 살 때 남의 집 식초를 자기 것인 양 친척에게 베푼 걸 보고서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소수다. 대부분 중국인들은 미생을 ‘신뢰’의 표상으로 떠받든다. 『한서』 『사기』 『삼국지』 등이 모두 치켜세웠다. 이백이나 탕현조 등 문인들은 아예 칭송하기 바빴다. 이런 뒷얘기를 모르고 고사를 쓰는 바람에 반격의 빌미만 제공했다.
박근혜는 즉각 따졌다.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고 애인은 없었다.”며. 그런데 역시 잘 모르다 보니 너무 나갔다. “미생은 비록 죽었지만 후에 귀감이 됐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박근혜의 짐작과 달리 미생의 애인은 다음 날 임을 따라 목숨을 끊었다. 반대하는 부모의 감시에 막혀 약속을 못 지킨 자신을 원망하며.
박근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증자의 돼지’를 동원했다. 증자가 자식과의 약속을 지키려 전 재산인 돼지를 삶은 고사다. 그러나 이 고사도 안티가 많다. 중국에선 증자는 신뢰보다 효자의 표상이다. 그런데 전 재산인 돼지를 삶는 바람에 부모 공양에 소홀하게 됐다는 것이다.
MJ는 측근의 훈수로, 박근혜는 책에서 봤다는데 고사를 사용한 솜씨가 별로다. 두 고사는 양면성이 있다. 뒷얘기도 많고 평가도 크게 갈린다. 애초 ‘논쟁용 무기’론 맞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목표했던 세종시는 어디 가고 애꿎은 ‘공자님 말씀’ 논쟁만 남았다. 달을 보라는 데 엉뚱하게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 셈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만 탓할 일도 아니다. 한국 정치의 풍토 탓이 크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판은 중국 고사의 경연장이 됐다. 선두엔 JP가 있다.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자 ‘봄은 봄이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고 운을 뗐다. 압권은 97년, DJP연합을 촉구하며 쓴 ‘안팎에서의 협력(啐啄同機)’이다. 93년 김재순 전 국회의장의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兎死狗烹)’도 빅 히트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중국 고사를 쏟아냈다. 사전을 끼고 사는 정치인도 있었다. 급기야 한 문장에 3개씩 쓰기도 했다. “살얼음을 딛는 것 같아(如履薄氷) 하루 세 번 반성하고(一日三省) 소박한 생활(簞食瓢飮)을 하겠다.”(2006년 강재섭)가 그것이다.
올해 국정 화두는 ‘더 큰 한국’이다. 나라의 격을 높이자는 목소리도 크다. 그래 놓고 여당 대표선수들이 본인도 잘 모르는 중국 고사 논쟁을 벌이는 모습은 영 남세스럽다. 국산품 애용 포스터를 그리면서 외제 물감 쓰는 꼴이요, 자주 국방하자며 남의 나라 무기로 훈련하는 꼴이다. 음식·문화는 한류(韓流) 세계화를 외치면서 정치는 언제까지 한류(漢流)만 애용할 건가. http://news.joins.com/article/995/3985995.html?ctg=1100&cloc=home|list|list3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기자 jjyee@joongang.co.kr 2010.01.26 20:04 입력 / 2010.01.27 02: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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