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3. 13:58ㆍ言語
외국어 표기 한글 새 문자 논쟁
이인철 서울아산병원 울산의대 교수가 ‘f, v, z, r, th’ 등의 영어 발음을 표기하는 다섯 개의 새 한글 문자를 제안하는 글을 ‘편집자에게’란에 쓴 것이 1월 12일이었다. 그러자 4일 뒤 조남호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이 반론을 폈다. 이 논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시 황재룡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전문연구위원이 5일 뒤에 외래어 표기를 위한 새 한글 문자 도입을 주장하자 바로 다음 날 강성곤 KBS 아나운서가 “문제가 많다”고 반박했다. 그 후로도 조선일보 독자서비스센터에는 한글 새 문자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이 수십 건 접수되고 있다.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표명해 온 최성철 한글연구회 회장과 이덕환 서강대 교수(과학커뮤니케이션)의 찬반론을 싣는다.
찬성 : ‘f’발음‘ㅍㅎ’으로 표기해야
영어 발음 표기 위해 새 문자 반드시 필요… 훈민정음 竝書규칙으로 모든 발음 표기 가능
한글을 발전시켜 세계화하고 국민들에게 올바른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한글 새 글자는 꼭 필요하다. 한국은 1년에 15조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면서도 TOEFL이나 TOEIC 시험에서 거의 꼴찌에 가까운 '영어 못하는 영어 공화국'이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영어 발음에 지극히 취약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file'을 '파일'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pile'로 알아듣는다. 'leader'를 '리더'로 발음하고 있으니 역시 'reader'로 알아듣는 것이다.
'banana'의 영어 발음은 '버내너'인데 우리는 일본식 '바나나(バナナ)'를 그대로 본떠 발음하고 있다. 말썽 많았던 'orange'도 일본식 '오렌지(オレンジ)'를 본떠 표기하고 발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summer'라는 영어를 '썸멀'이라 하면 외국어이고, '서머'라고 하면 외래어인 우리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일이다. '외래어'라는 학술용어 자체가 원래 일본말이다. 일본에서조차 외래어는 외국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우리 국어학계에서는 우리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바나나'는 우리말이고 '버내너'는 외국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국문학계 정설이다. 일상용어를 일본식 발음이거나 잘못된 발음으로 생활하면서 영어를 매일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한글 맞춤법' 제1항에서는 자모의 수를 40개로 제한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정신을 크게 훼손하는 조치이다. 또한 두음법칙(頭音法則)이라는 전근대적인 규정은 우리로 하여금 'ㄹ'의 발음기관을 퇴화시킬 뿐만 아니라 'r'에 대한 발음을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인철 울산의대 교수의 문제의식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문자는 한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기에 사회적 비용이 든다는 반론이 나온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정신을 살려 새로운 '한글 맞춤법'과 '빌린 말 표기법'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종대왕의 창제정신을 받들어 훈민정음에 감춰진 소리의 보물 곳간을 열어 활용한다면 한글과 다른 이상한 모양의 글자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활자를 새로 만드는 사회적 비용도 전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국어학자들이 편협한 사고를 버리고 여기에 동참할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반대 : 한글은 영어 ‘발음기호’ 아니다
새 문자 도입해도 모든 발음 표기 못해… 외래어는 우리말化 된 것 다른 나라도 원어 안 따라가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한글 새 문자를 더 만들자는 것은 물론 가능한 주장이다. 인간의 발성 특성을 충분히 고려한 진정한 표음(表音)문자인 우리 한글이 그만큼 유연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한글 창제원리를 제대로 활용하면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보급하게 된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글로 다른 언어의 발음을 제대로 적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 국민이 모든 언어를 발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적기 위해 한글을 바꾸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철학과 예술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영어만큼 중요하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 중국어와 러시아어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말과 글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외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적으려는 노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어의 'file'과 'pile'을 똑같이 '파일'로 적어 구별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눈(眼)과 눈(雪)이 구별되지 않고, 벌(蜂)과 벌(罰)이 구별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어야 한다. 같은 발음의 단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어떤 언어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굳이 모든 영어 단어를 구별해서 적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몇 개의 자음을 구분한다고 영어 발음이 정확하게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영어의 악센트와 장단을 표기하는 방법도 함께 개발해야 한다. 물론 그런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이 영어의 '발음기호'가 될 이유가 없다. 혹시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로마 알파벳을 포기하고 한글을 쓰도록 할 생각이라면 또 모르겠다.
한글에 대한 이런 논란은 '외래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외래어는 다른 언어에서 유래되었지만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닌 우리말이다. 그런 우리말을 원어와 똑같이 발음하고 적어야 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발음하기 편하고, 우리말과 잘 어울리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국수주의적인 생각이 아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로마 알파벳을 공유하는 유럽의 다양한 언어에서는 똑같은 단어를 서로 다르게 발음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의 이름을 각자 언어의 입맛에 맞도록 완전히 바꿔버리기도 한다. 원어 발음에 신경 쓰지 않는다. 굳이 원어의 발음과 의미를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원어 표기를 그대로 쓰면 된다. 우리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번 논란은 맞춤법과 띄어쓰기조차 통일시키지 못하고, 외래어표기법을 두고 갈팡질팡해왔던 어문당국이 자초한 일이다. '어륀지' 소동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인터넷에 난무하는 황당한 신조어도 방치해왔던 어문당국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 과거의 낡은 원칙에만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말 순화를 앞세워 된소리로 시작하는 외래어를 거부하는 원칙의 재검토도 필요하다. 최성철·한글연구회 회장 이덕환 서강대 교수·과학커뮤니케이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2/2010020201791.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2&Dep3=h2_06 입력 : 2010.02.02 23:32 / 수정 : 2010.02.03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