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馬 柳致煥

2010. 8. 29. 12:39故鄕

탄생 102주년 '청마 유치환' 발자취를 더듬다

여자는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하셨던 교장선생님 靑馬는 여고생들의 우상, '사인'받으러 교장실 앞 긴 줄… 통영 우체국엔 20년 사랑의 흔적이

1963년 7월 4일 오전. 부산의 한 여자고등학교 전체가 술렁거렸다. 수업은 하지 않고 전교생이 교문 앞에서 학교 건물까지 두 줄로 도열한 채 누군가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입은 모두 귀에 걸려 있었다. 그야말로 '오매불망', '학수고대', '희불자승'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이 감수성 예민한 갈래머리 여학생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을까. 청마 유치환(1908~1967)이었다. 그 무대는 경남여고.

▲ 1963년 경남여고 가을 소풍 때 금정산에서 포즈를 취한 청마

그가 교장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이날 오전 입소문을 타면서 학교 수업은 순식간에 마비됐다. 당시 남용강(65) 학생회장의 회상 한 토막. "'깃발' '바위' 등의 시를 애송하며 마음속으로 연정을 품었던 청마 선생이 부임한다는 소식은 일순간 학교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기에 충분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으로서 뿌듯했고 동시에 대단한 행운이었죠."

유난히 하늘이 파랬던 다음 날 상견례를 겸한 조회시간. 전교생과 교사들은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당대 최고 시인이 어떤 화두를 던질지 궁금했다. 모든 시선은 그의 입에 모아졌다.

"여자는 꽃으로도 때릴 수 없습니다. 하물며 여러분 같이 어여쁜 소녀들에게…." 뜨거운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상상도 못했던 파격 그 자체였다. "과연 청마였다." 교무실과 교실의 반응은 그랬다.

청마의 파격적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교훈도 바꿨다. 당시 교훈은 1958년 제정된 '근검하고 관대하라 / 봉공정신을 가져라 / 의뢰심을 갖지 말라'. 여자고등학교 교훈으로는 누가 봐도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그가 내놓은 교훈은. '억세고 슬기로운 겨레는 / 오직 어엿한 모성에서 이루어지나니 / 이 커다란 자각과 자랑에서 / 우리는 스스로를 닦는다.' 독특하게 '겨레의 밭'이라는 제목도 있었다. 짤막한 한 편의 시 형식을 띤 것으로, 청마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청마다움'이 묻어난다.

▲ 경남여고 교장실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 청마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교훈은 여성을 한 인격체 대신 '모성'이나 '밭'을 너무 강조했다는 지적이 제기될 수 있다. 이웃 부산고 학생들이 "그럼 우린 '겨레의 씨'다"고 우겨댄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 한 번 더 곱씹어 보면 겨레의 기틀로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되자는 의미라는 것이 학교 측이나 졸업생들의 설명이다.

이 교훈에 얽힌 웃지 못 할 에피소드 하나. 참여정부 때인 지난 2000년 교육부는 남녀차별금지법에 의거해 전국 여자 중·고교의 교훈을 조사해 '순결' '몸매' '부덕(婦德)' 등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줄 수 있는 단어가 들어 있는 교훈을 바꾸라는 지시를 일선 시교육청을 통해 하달했다. 경남여고도 그 유탄을 피하지 못했다.

모교 출신 교사(교장 역임)로 당시 학생부장 겸 동창회 업무를 맡았던 백월아(65) 씨의 이에 대한 후일담. "교육부나 시교육청조차 청마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말초적 교훈을 지닌 학교와 함께 일괄적으로 공문을 보낸 사실에 대해 동창회를 비롯한 학교 전체가 분개했지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시교육청을 설득시켜 지금까지 '겨레의 밭'이라는 교훈이 살아남게 됐지요."

▲ 옛 모자상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한 청마. 함께 사진을 찍은 학생들은 졸업후 모교 교장을 역임했던 백월아(왼쪽) 씨와 동기 김영화 씨다.

지난 23일은 청마 탄생 102주년 기념일. 언론의 문화면조차 그 흔한 기사 한 꼭지 싣지 않았다. 씁쓸했다. 세월의 무상함인가. 보다 못한 게으른 기자가 '주말&엔'을 빌어 청마의 발자취를 뒤늦게 더듬었다. 자료를 찾던 중 청마 제자 문덕수의 '청마 유치환 평전'에 언급된 글귀가 눈길을 확 끌었다. '1958년 가을 경주고 제자들과 술자리를 함께했다. 한 학생이 교장인 청마에게 당돌한 질문을 하나 했다. "선생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청마가 대답했다. "사랑이란 어처구니없는 것!"

◇ 靑馬의 발자취

- 경남여고 졸업생들은 기억한다.

- 조회시간에 시를 낭송해주던 로맨티스트 교장선생님을

- 통영 중앙우체국은 기억한다.

-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던 수천 장의 연서를

- 거제 부부묘엔 남아있다.

- 남편의 다른 사랑을 인정한 채 평생을 살아야했던 한 여자의 마지막 자리가

정운 이영도의 오빠인 시조시인 이호우의 경북 청도 시비를 찾은 문인들. 우측이 청마, 앞줄 가운데가 정운이다. ▶

청마 유치환(1908~1967)은 부산과 적지 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동래고보를 졸업했으며, 22세 때 권재순 여사와 결혼한 후 1934년 부산으로 이주, 1년간 한 백화점에서 근무했다. 6·25전쟁 땐 부산으로 피란, 경남문총구국대에 편입해 국군 제3사단 소속으로 종군했다. 교편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에서 잡기 시작해 1952년 함양 안의중학교 때 처음 교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경주 대구 등지를 거쳐 1963년 7월 부산 경남여고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산에 정착했다. 이듬해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1965년 영도 남여상(현 부산영상예술고)으로 옮긴 뒤 60세 때인 1967년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청마는 교가도 많이 지었다. 통영초등 통영고 통영여고 둔덕중 대구여고와 부산고 동래고 등등. 시비는 국내 시인 중 가장 많다. '만인의 연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일까. 부산에도 5개의 시비가 있다. 에덴공원과 동래고의 '깃발', 남여상과 부산진역 앞 수정가로공원의 '바위', 용두산공원의 '그리움'.

■ "교장선생님이 아닌 시인으로 대했다"

◀ 청마를 교장으로 모신, 그래서 청마를 잊지 못하는 경남여고 35기 동기생들이 강갑회 교감과 함께 모자상 앞에서 청마를 떠올리고 있다. 왼쪽부터 허정임, 백월아, 남용강 씨.

지난 20일 오후 동구 수정동 경남여고 역사관. 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여성들이 모처럼 자리를 함께했다. 남용강 백월아 허정임. 올해 65세인 이들은 경남여고 35기 동기생으로, 청마 유치환이 교장으로 부임할 때 3학년이었다. 남 씨는 당시 학생회장이었고, 백 씨는 교장과 평교사로 13년간 모교에 근무했다. '문학소녀'였던 국어교사 출신인 허 씨는 청마를 가장 잘 기억했다. 그들은 "청마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두 기수 중 처음이었다는 사실이 우리 생애에 큰 행운이었다."며 소녀처럼 자랑했다.

"여름에는 노타이로, 평소에는 베레모 비슷한 모자를 자주 쓰셨던 청마 선생님은 저희에게 '공부하라' 대신 '책을 많이 읽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후 열린 어느 조회시간에선 수상자의 시를 낭송한 후 해설까지 해주신 로맨티스트였기도 했어요."

허 씨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청마를 교장선생님이라기 보다 흠모의 대상으로 여겼다"며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교장실을 찾았다"고 기억했다.

◀ 통영 청마문학관(위)과 청마와 정운이 함께 근무했던 옛 통영여중 건물. 지금은 통영문화원이다.

부임한 그해 겨울 청마는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발간했다. 책을 구입한 몇몇 학생이 교장실을 찾아 사인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후 교장실 앞은 한동안 쉬는 시간이면 길게 줄이 이어지는 진풍경이 일기도 했다.

청마와 함께 찍은 사진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나무와 꽃을 관찰하며 유난히 교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청마는 학생들과 사진을 찍는 전속 모델이었다. 이날 허 씨와 백 씨는 오랫동안 고이 간직한 빛바랜 흑백 사진을 갖고 왔다. 백 씨는 "경여고 학생이라면 대부분 모자상 등 교내에서 청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있다"며 "그때 왜 팔짱을 못 끼고 찍었는지 아쉽다"며 활짝 웃었다.

청마 선생을 두고 당시 조순(시인) 국어선생은 수업시간에 농담으로 이런 말씀을 자주 했다 한다. "저렇게 멋있는 분을 두고 연애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공부만 하는 이 둔한 녀석들아!" 47년이 지난 지금도 청마는 여전히 그들에겐 영원한 노스탤지어였다.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거제도 둔덕골 방하리에 위치한 청마의 묘

청마는 말년 객지 생활 10여 년을 빼놓고 대부분을 고향인 통영에서 보냈다. 물론 젊은 시절이었던 일제강점기 때 평양 만주 부산 등을 잠시 전전하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뼈대는 누가 뭐라해도 통영이었다.

통영에서 청마의 발자취는 통영중앙우체국에서 가장 많이 묻어난다. 마흔을 바라보던 청마는 아홉 살 연하의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1916~1976)에게 20여 년간 5000여 통의 연서를 보냈는데 5년여 이 우체국을 이용했다. 청마는 잘 나가는 시인 겸 통영여중 교사였으며, 경북 청도가 고향인 문재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남편과 사별 후 딸 하나를 둔 과부였다. 통영으로 시집 온 그의 언니 집에 머물렀던 것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였다.

정운은 처음 수예점을 운영하다 이후 청마가 근무하던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정운을 보기 위해 청마는 수예점이 훤히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고 또 썼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정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파도여 어쩌란 말이냐 / 파도여 어쩌란 말이냐 / 님은 뭍 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여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그리움)

청마 사후 정운은 '탑'이란 시를 통해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저마치 가고/나는 여기 섰는데 / 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 / 돌아선 하늘과 땅 / 애모는 사리로 맺어 / 푸른 돌로 굳어라'

지금 청마거리엔 정운도 청마도 없지만 당시 그들이 머물렀던 흔적은 남아 있다. 정운이 운영한 수예점과 그의 언니가 운영하던 약방 '박애당'은 우체국에서 바로 보이는 옷가게 '시선집중'터다. 또 청마의 집필장인 영산장과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운영하던 문화유치원(2000년 폐원)이 있던 충무교회는 우체국에서 세병관 방향으로 불과 5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도중 만나는 공영주차장은 두 사람이 가끔씩 찾던 옛 봉래극장 터다. 청마와 정운이 함께 근무한 통영여중은 충무교회에서 서문고개 방향으로 200m쯤 떨어진 붉은색 벽돌건물이다.

통영시 문화예술과 김순철 문화예술담당은 "통영을 찾은 관광객 중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청마거리라고 답한다."고 말해 통영에서의 청마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청마문학관은 청마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 이곳에서는 청마의 유품과 각종 문헌자료 3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정운이 펴낸 서간시집 '사랑하였으므로…'와 '이영도 평전' 등 정운에 관한 자료와 사진도 보인다.

■ 출생지와 친일 논란…그를 위한 변명

언제부턴가 친일문제와 출생지를 논하지 않고선 청마를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취재 도중에도 이를 여실히 느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청마와 관련,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 결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어 팩트만을 간략하게 전한다.

우선 친일 문제. 지난해 11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홍난파 안익태 박정희 등 4389명을 친일 인물로 발표했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청마와 관련해선 공청회까지 열어 갑론을박 했지만 결국 청마는 친일 논란에서 빠졌다.

▲ 경남 양산 백운공원묘지를 찾은 청마의 조강지처 권재순 여사. 당시 청마의 벗 박노인 시인과 함께 갔다고 한다.

다음은 출생지 문제. 지난 2004년 대법원 민사소송 상고심 재판부는 "청마의 출생지는 거제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사실상 통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마의 세 딸이 거제 측 원고였으며, 피고는 통영시장이었다. 이와 관련, 남송우 부경대 국문과 교수는 "이 재판에서 원고는 '청마의 출생지가 통영시 태평동'이라고 적힌 통영 청마문학관의 청마 연보를 삭제해달라는 것이었다."며 "출생지 자체에 대한 재판은 아니었으며, 이는 법원에서 판결할 문제가 아니다"고 견해를 밝혔다.

■ '멀지 않아 저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

'거제도 둔덕골은 /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 살으신 곳 / 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 / 몇 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청마의 묘는 그의 시 '거제도 둔덕골'에서 밝힌 것처럼 선산인 거제 둔덕면 방하리 산방산 지전당골 산록에 위치해 있다. 묘지 입구 너른 터에는 청마 탄생 100주년 때인 지난 2008년 청마의 흉상과 함께 그의 역작 '행복' '깃발' '춘신(春信)' '행복' '바위' '낮달' '울릉도' '동백꽃' 시비가 너른 터를 동그랗게 에워싸고 있다.

청마의 묘에 서면 남으로 둔덕만과 한산섬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묘를 감싸고 있는 송림 뒤로는 산방산이 솟아 있다. 지관이 아닐지라도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가까이로는 둔덕면 어귀 방조제 둑과 마을을 연결하는 청마교와 청마 고향시비동산이 보인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청마는 원래 부산 승학산 기슭에 묻힌 후 동아대 하단캠퍼스 확장공사 때인 1981년 경남 양산 백운공원묘지로 이장됐다. 이후 그가 쓴 '멀지 않아 저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라는 '사모곡'의 바람대로 지난 1997년 이곳으로 옮겨 모셔져 있다. "그토록 목숨 같은 사랑인데 어찌하겠어요?"라고 살아생전 대범하게 청마와 정운의 관계를 인정한 조강지처 권재순 여사의 묘와 함께. 청마의 부모 묘는 바로 옆에 합장돼 있다. 그 앞에는 청마가 쓴 '사모곡'이 오석에 음각돼 있다.

청마 탄생 100주년에 맞춰 개관한 2층 규모의 청마기념관에는 청마의 사진,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서신, 교원 발령증 등 250여 점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 청마를 기리는 부산 지역 시비들

▲ 왼쪽부터 용두산공원 '그리움', 동래고 '깃발', 부산영상예술고(옛 남여상) '바위', 에덴공원 '깃발'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1600&key=20100827.22018193950 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입력: 2010.08.26 20:47 / 수정: 2010.08.2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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