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6. 11:30ㆍ言語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는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하여,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바꾸어 1917년까지 활동하다가 4년 동안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후 1921년 12월 3일 임경재, 최두선, 이승규 등이 모여 국어연구 및 국어운동단체인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고쳐 재건하였다. 10년 뒤인 1931년 1월 10일의 총회 결의에 따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고, 광복 뒤 1949년 9월 5일 정기총회에서 다시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6년11월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했고, 1928년에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1932,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치렀으며, 1934~45년에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8일에 행사를 치렀다.
지금의 한글날은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인 해례본(전형필본)을 발견하여 그 말문(末文)에 적힌 ‘正統十一年九月上澣’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1446년(세종 28) 10월 9일이므로 1945년에 10월 9일로 확정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학술대회 및 각종 백일장을 거행한다.
한글 이름의 변천사
1. 훈민정음
세종대왕께서 우리글을 창제할 때 붙인 이름(1443년)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序)에서 ‘癸亥冬 我殿下創製 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 以示之 名曰訓民正音’이라 했고, 『세종실록』 28년(1446) 丙寅 9월조(條)에는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異乎中國’이라 하여 정음이라 했고, 『월인석보』의 서에서는 어제훈민정음(예의본, 월인석보본)에도 百姓을 ‘가르치시논 正(졍)한 소리라’고 했다.
2. 언문(諺文)
‘상스런 말을 적은 글이란 뜻’으로 우리글을 비하한 명칭이다. 『세종실록』 계해(세종 25년) 12월조(條)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이라 했고, 『세종실록 』병신(26년) 2월 20일 상소문에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今之諺文不亦便民乎’이라 했고, 세종 28년 새로운 문자의 보급과 실천을 위해서 諺文聽 설치했다.
이것은 중국말을 ‘언어(言語)’라 하고, 중국글을 ‘한문(漢文), 진서(眞書)’라고 한데 반하여 우리말은 ‘방언(方言), 이어(俚語), 속어(俗語), 언어(諺語)’라 하고, 우리글을 ‘언문(諺文), 언서(諺書), 언자(諺字)’라 했는데 이는 모두 당시의 정치, 사회적 배경으로 말미암은 중화중심의 사대사상의 결과이다.
3. 반절(反切)
반절(半切)이란 한자의 음을 나타낼 때 쉬운 다른 두 한자의 음을 이용하여 성(聲)과 운(韻)을 반씩 따서 합쳐서 한자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天’은 ‘他前’[(ㅌ+ㅕ+ㄴ)>텬]으로, ‘東’의 음은 ‘德紅’[(ㄷ+ㅗ_ㅇ)>동]이 되는 것 따위이다. 이와 같이 우리글은 음소문자(낱소리글자)라서 소리를 나타내는 방법이 반절과 비슷하다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訓蒙字會)에 ‘諺文字母 俗所謂反切二十七字’이라 했다.
4. 이후 암클, 창살글자, 중글, 상말글로 불러서 우리글을 비하하였다. 심히 개탄스러운 일이다.
5. 근대 우리글
갑오경장(1894) 이후는 우리글을 ‘국어(國語), 국문(國文)‘이라 하였다. 근대 우리글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주시경선생의 저서에 『국문론(1897)』, 『국어문법(1898)』, 『국문문법(1905)』이 보이고, 선생께서 활동하신 학술단체의 이름에도 ‘국문동식회(1896), 국어연구회(1907)’가 보인다.
이후 『보중친목회보』 1호(1910)에 실린 주시경선생의 글에도 한나라말(韓)로 ‘한국어’, 한나라글로 ‘한국문’이 나타났다. 경술국치(1910) 이후에는 국가가 없었으니, ‘조선어’라 하여 ‘조선어문법(1911), 조선어전(1911), 조선어강습원(1911)’ 등이라 하였다. ‘한말’이라 하여 국어연구회 강습소 제2회 수료증서(1911.4.1)의 문구에 ‘한말익힘곳침’도 보이고, ‘배달말’이라고도 하여 1911년 9월 17일 ‘국어연구회’를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로 바꾸었다.
1913년 3월 23일 주시경선생이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 朝鮮言文會)’를 ‘한글모’로 바꾸었고, 같은 해 9월 최남선의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서 창간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가로글씨로 ‘한글풀이’라 한 것도 있다.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이 ‘한글배곧’으로 이름을 바꾸고, 김두봉의 『조선말본(1915)』의 머리말에 ‘한글모임자 한샘’이 나타나는 것 등의 사실로 볼 때 처음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한글’이란 명칭은 주시경선생이 지은 우리글 이름으로 ‘한’은 ‘큰’이란 뜻으로, 1913년 무렵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혼란스럽게 사용하였으나, 우리민족의 유일한 글이란 뚜렷한 자부심이 군데군데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이후 1927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기관지 『한글』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였다.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1928년 11월 11일 조선어연구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른 때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