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꿈

2009. 11. 19. 13:05受持

모든 사람의 이름엔 부모의 꿈이

강희안·희맹 형제는 안회·맹자에서 딴 것, 이백년·이천년·이만년·이억년·이조년 형제도

이순신 형은 이요신 말단관직도 못한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요순'을 꿈꿨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라만은

다정(多情)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시조는 고려 말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다정가(多情歌)다. 그는 혼란한 정국에서도 기개 있었던 선비로 통한다. 여기서는 그의 문학이나 정치활동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 형제들의 이름을 짚어보려 한다. 그는 5형제의 막내였다. 그의 형들의 이름은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이었다. 아마 이조년의 동생이 태어났다면 이경년(李京年), 이해년(李垓年)으로 이어갔을 것이다. 이조년의 아버지 이장경은 자식들의 무궁무진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기원하며 그렇게 이름 지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고 그중에서도 발군이었던 이조년의 손자들 중에서 인재가 많이 나왔다. 당시 정국을 좌우했던 이인복(李仁復), 이인민(李仁敏), 이인임(李仁任) 등이 그들이다. 조선 초 성주(星州) 이씨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조년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 문신이자 세종의 아랫동서 강석덕(姜碩德)은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은 강희안(姜希顔·1417~1464), 차남은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었다. 감히 공자(孔子)의 이름을 따서 강희공(姜希孔)이라고 지을 수는 없었을 테고 대신 각각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안회(顔回)와 맹자(孟子)에서 한자씩 따와 이름을 강희안, 강희맹이라고 지었다. 강희안은 관찰사 등을 지냈고 시 그림 글씨에 뛰어나 세종 때부터 안견 최경과 더불어 '삼절(三絶)'로 꼽혔다. 아우 강희맹은 성종 때 정승 바로 아래인 의정부 좌찬성에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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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정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중종 때의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아버지는 관찰사와 각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조선 초의 명신 정난종(鄭蘭宗·1433~1489)이다. 강희맹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정난종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정광보(鄭光輔), 둘째가 정광필(鄭光弼)이다. 국왕의 보필(輔弼)을 지상목표로 생각했던 정난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세종에서 성종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기에 목숨을 부지하고 영예를 누릴 수 있었는지 모른다. 셋째는 정광좌(鄭光佐)로 이 또한 보좌(輔佐)의 염원을 담았다. 막내는 정광형(鄭光衡)이다. 임금과 백성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아주라는 뜻이었을까?

성종 때 승지로 있으면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연산군 때 정치보복 제1호가 됐던 비운의 예조판서 이세좌(李世佐·1445~1504)는 주역(周易)의 세계를 닮고 싶은 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주역'의 4대 원리인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리(利)만 같은 뜻의 의(義)로 바꿔 네 아들의 이름을 이수원(李守元) 이수형(李守亨) 이수의(李守義) 이수정(李守貞)으로 지었다. 너무 원대했던 탓이었을까? 이세좌가 죽은 직후인 연산군 10년 5월 13일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4형제가 동시에 목이 달아나는 참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죽은 이수정의 둘째 아들이 훗날 명종 때 영의정에 오르게 되는 명재상 이준경(李浚慶)이다. 이세좌의 꿈은 아들 대를 건너뛰어 실현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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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李貞)은 지방의 말단관직도 제대로 맡아보지 못한 몰락한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참으로 원대했다. 그것은 네 아들의 이름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이희신(李羲臣)으로 고대 중국의 이상적 인물인 복희씨(伏羲氏)에서 따왔다. 둘째는 이요신(李堯臣)이고 셋째가 바로 이순신(李舜臣)이다. 요순(堯舜)시대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신하가 되라는 이정의 꿈과 기대를 읽을 수 있다. 당연히 막내의 이름은 우왕에서 따와 이우신(李禹臣)이다.

조선 중기 때 의정부 우참찬 오억령, 대사헌 오백령 형제는 이조년 형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선 오억령(吳億齡·1552~1618)이 형이라는 점에서 이조년 형제들과는 순서가 반대이고 이어 오만령, 오천령이 없이 곧바로 오백령(吳百齡·1560~1633)으로 내려오는 것도 차이가 있다. 그 사이에 난 두 형제가 조졸(早卒)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긴 이조년 형제나 오억령 형제 모두 돌림자가 년(年)이나 령(齡)인 것을 보면 부모가 자식들의 출세보다는 무병장수를 기원해서 그렇게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의 이름에는 그 부모들의 꿈이 녹아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0/2008062000853.html 입력 : 2008.06.20 13:37 / 수정 : 2008.06.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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