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변한다

2009. 12. 13. 14:08LEISURE

프로축구 트로이카의 10년을 돌아보다

양웅불구립(兩雄不俱立) : 둘 이상의 영웅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뜻. 그러나 아니다. 역사상 세 명의 영웅이 함께 활약했던 적도 있다.

1998년 한국 축구계에는 3명의 혜성이 등장해 팬들을 열광시켰다. 고종수(대전·당시 수원) 이동국(성남·당시 포항) 안정환(부산·당시 부산)이 그 주인공. 이들은 서로 다른 팀에서 경쟁하며 프로축구의 중흥을 이끌었다. 그 뒤 10년 동안 이들이 펼친 희비의 3중주는 그대로 오늘 K-리그의 현재와 미래를 웅변한다. 그런 점에서 셋의 존재는 ‘오래된 미래’이다.

▲ 왼쪽에서부터 안정환, 고종수, 이동국

● 축구 천재 트로이카의 출현

고종수는 창조적인 패스로 공간을 만들었고, 특유의 왼발 프리킥으로 상대 골문을 위협했다. 안정환은 지능적인 플레이로 골망을 흔들었고 허를 찌르는 중거리 슛이 일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동국도 뛰어난 공중볼 처리 능력과 날카로운 슛으로 차세대 대형 스트라이커로 주목받았다.

이들의 뛰어난 실력과 준수한 외모에 각 구단의 스포츠마케팅까지 더해진 결과 축구를 잘 모르던 여성들까지 구장을 찾게 됐다. 이에 따라 1998년 K리그(185경기)는 출범 16년 만에 처음으로 200만 관객몰이에 성공한다. 이어 이듬해에는 경기당 평균 1만 4413명의 관중(191경기 275만 명)을 동원했다. ‘한일월드컵 특수’를 누렸던 2002년 1만 4651명에 이은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

셋은 1998년 신인왕(이동국), MVP(고종수), 1999년 MVP(안정환)를 나눠가지며 한국축구에 한 획을 그었다.

▲ 안정환

● 영원할 것 같았던 성공가도

이들의 성공가도는 계속된다. 2000년 이동국은 잦은 부상과 대표팀 차출로 국내 경기에서는 많은 활약을 넣지 못했지만(8경기 4골) 아시안컵 6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2001년에는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으로 임대,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부상을 달고 산 고종수도 1999년(21경기 4골 7도움) 2000년(13경기 7골 3도움) 이름값을 한 데 이어 2001년에는 20경기에서 10득점 6도움의 활약을 펼쳤다.

안정환도 2000년 20경기에서 10골을 넣으며 ‘킬러’의 면모를 보여준 후 그해 7월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AC페루자)에 몸담게 된다. 이들에겐 ‘한국 축구 10년’을 책임질 기둥이란 기대가 쏟아졌다.

▲ 고종수

● 한일월드컵 희비 교차

축구선수에게 ‘기회의 장’인 월드컵은 그러나 이들의 명암을 극명하게 갈리게 만든다. 출발은 고종수가 좋았다. 그는 히딩크호 출범 멤버로 2001년 1월 칼스버그컵에서 2골을 넣는 등 빼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황태자’로 불렸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25일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불행이 그를 덮쳤고 이후 송종국·김남일 등에게 국가대표 주전을 빼앗겼다. 그 과정에서 히딩크 감독이 고종수의 정신력 해이 등을 문제 삼으며 고종수는 대표팀과 멀어지게 된다.

부상 이후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펼치지 못하던 차에 또 다른 악재가 겹쳤다. 고종수는 그해 10월 음주 폭행 혐의로 입건되는 등 ‘말썽꾼’ 이미지만 부각됐다. 2001년 20경기 10골 6도움으로 빛났던 그는 이듬해 20경기에 출전, 4골 3도움의 ‘평범한’ 활약을 보였을 뿐이다.

한편 이동국은 제대로 국가대표 주전 경쟁을 펼치지도 못한 채 꿈을 접어야 했다. 히딩크 부임 초반 몇 차례 출전했으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대표에서 탈락됐다.

반면 안정환은 막판 스퍼트에 성공하며 트로이카 중 유일하게 월드컵 대표를 꿰찼다. 체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초반 중용되지 못했던 그는 ‘게임메이커 부재를 해소해 줄 대안’이란 여론을 등에 업고 본선 D조 미국전 동점골, 16강 이탈리아전 역전 골든골을 넣으며 월드컵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 이동국

● 인생사 새옹지마

월드컵 때 눈부신 활약을 펼친 안정환에게 핑크빛 미래가 보장될 것임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정반대 상황이 빚어졌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한국과의 경기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여론이 일며 페루자에서 뛰던 안정환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후 안정환은 외국에서 기나긴 방황을 하게 된다. 그는 시미즈 에스펄스(2002년 9월~2003년 12월) 요코하마 마리노스(2004년 1월~2005년 6월) 프랑스 FC 메스(2005년 7월~2006년 1월) 독일 MSV뒤스부르크(2006년 1월~9월)등 4년 동안 3개 나라에서 4개 팀을 전전한다.

월드컵 대표팀 탈락의 아픔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쟁취로 대신하려던 이동국. 그러나 4강에서 이란에 승부차기로 져 그 꿈마저 물거품이 된다. “열심히 뛰지 않는다.”는 팬들의 원성도 계속됐다.

수많은 비난을 뒤로 한 채 이동국은 2003년 3월 입대, 광주 상무 소속으로 경기를 치르게 된다. 박지성·송종국 등이 월드컵 4강 진출로 군 면제 혜택을 받은 것과는 달리 국제경기와 ‘특별한 인연’이 없던 이동국에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의무적으로 간 군대였지만 그에겐 오히려 또 다른 기회가 됐다. 입대 후 2시즌동안 50경기에서 15골을 넣으며 ‘대표 스트라이커’의 부활을 알렸다. 뿐만 아니라 11도움을 기록, 팬들로부터 “한층 성숙해졌다.”는 평을 들으며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2004년 6월~2005년 8월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 밑에서는 골망을 11번 가르며 국가대표팀 내 최다 골을 기록했다.

한편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고종수는 2003년 초 모험을 강행한다. 원소속 구단인 수원의 동의 없이 J리그에 진출했던 것. 고종수는 박지성이 거쳐 갔던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하며 제2의 부활을 꿈꿨다. 그러나 한 번 무너진 ‘천재’는 쉽게 제자리를 찾지 못해 결국 13경기 1골의 초라한 성적 끝에 7개월 만에 방출됐다.

● 또 다른 월드컵

2004년 안양LG와 줄다리기 끝에 고종수가 돌아온 곳은 친정팀 수원. 시즌 초반 날카로운 패스와 정확한 크로스를 선보이며 “되살아났다.”는 평을 들은 고종수. 그러나 불어난 체중과 동계훈련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같은 해 10월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다.

2005년 1월에는 2대 1 트레이드를 통해 전남 드래건즈로 팀을 옮겼다. 이 때 그는 ‘1’이 아닌 ‘2’에 속하며 ‘김남일 대 고종수+조병국’의 형태로 맞바뀌게 됐다. 그러나 마냥 굴욕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여수 출신인 고종수에게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이 있었고 지휘봉을 잡고 있던 허정무 감독과는 국가대표 시절인 1998년부터 인연이 있던 터였다.

전남은 ‘고종수를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우겠다.’는 꿈을 품고 있던 터여서 그의 부활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초반 허 감독 밑에서 맹훈련중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나 그해 고종수는 16경기 2골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겼다. 시즌 중반 부상이 찾아왔고 왼 발목 뼛조각 제거 수술까지 해야 했다. 결국 그는 고향 팀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1년간 소속팀 없이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월드컵 대표팀에는 발조차 들여놓지 못했다.

한편 안정환은 2006년 독일 MSV뒤스부르크로 팀을 옮겼지만 그가 활약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라운드를 밟는 시간에 비해 벤치를 지키는 일이 월등하게 많아 경기감각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5월 이후 팀에서 2경기 연속 골을 넣는 등 활약을 펼치며 월드컵행이 확정됐다. 한일 월드컵 때 2골을 넣은 그의 경험도 높게 평가됐다.

이후 안정환은 2006년 6월 13일 펼쳐진 독일월드컵 본선 G조 토고전에서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아시아 선수 첫 월드컵 본선 3호골의 주인공이 됐다.

한편 트로이카 중 월드컵행이 가장 유력시되던 것은 이동국이었다. 그는 제대 후 포항으로 돌아간 2005~2006년도 35경기에서 14골 5도움을 기록하며 2006독일월드컵 대표 자리를 일찌감치 예약해놨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월드컵행 티켓을 허락하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던 2006년 4월 그에게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란 불운이 찾아왔고 치료와 재활에만 반년이 걸렸다. 그 사이 월드컵은 이미 끝나 있었다.

하지만 이동국은 좌절하지 않았다.11월 5일 울산전서 K-리그 복귀 2경기만에 골을 터뜨리며 사자후를 토해냈다. 여세를 몰아 2007년 1월에는 미들즈브러에 입단. 꿈에 그리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진출에 성공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 중인 박지성처럼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 설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 다시 뭉친 트로이카

2007년 EPL 미들즈브러와 계약하며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4호로 기록된 이동국은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렇지만 컵대회 등에서 3·4부 리그 팀을 상대로 2골만 기록했을 뿐 리그에서는 단 한 골도 넣지 못하며 ‘허풍선이’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더구나 같은 해 7월 아시안컵 대회 도중 음주를 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돼 국가대표 자격을 1년 정지당했다. 결국 그는 빈손으로 1년 반만에 고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소속팀 없이 개인훈련을 하던 고종수를 다시 부른 건 대전 시티즌이었다. 최윤겸 감독이 부르고 김호 감독이 단련시켰다. 무릎 부상 등으로 풀 시즌을 뛰지는 못했지만 2007·2008시즌에 27경기에 출전, 3골 2도움을 기록했다.

안정환은 월드컵 이후 ‘소속팀 불운’에 또 시달려야만 했다.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같은 해 9월 뒤스부르크에서 방출되며 수개월간 ‘무적 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 결국 그는 2007년 1월 K리그 수원 삼성으로 U턴하게 된다.

● 그들의 2008년

2007년 고종수는 11경기에 출장 1득점 1도움을 기록했다. 자칫 저조한 성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주장으로서 한층 성숙해졌다는 평을 들으며 ‘악동’ 이미지를 떨쳐버렸다. 자신도 “팀을 위해 뛰겠다.”고 말하며 몸소 실천했다.

하지만 2008년 상황은 좋지 않게 변했다. 그는 시즌 중 재계약 조건을 놓고 구단과 갈등을 빚으며 훈련 등에 불참해 물의를 빚었다. 또 8월에는 무릎부상 수술 여부를 놓고 구단과 실랑이를 벌이며 눈 밖에 났다.

수원에 몸담게 된 안정환은 2007년 3월 14일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국내 무대 복귀를 알렸다. 이후 5월 23일과 30일 치러진 컵대회에서 각각 경남과 성남을 상대로 1골씩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외 별다른 실력발휘를 하지 못하고 1군과 2군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해 9월 11일 FC서울과의 2군 리그 경기에서는 상대팀 서포터스의 야유에 격분해 관중석에 뛰어들어 벌금 1000만원의 중징계가 내려진 적도 있다. 이후 안정환은 경기 감각을 살리려 했으나 더 이상의 골을 넣지 못한 채 2008년 1월 ‘친정’ 부산행을 선택했다.1년을 계약한 친정에서는 27경기에서 6득점 3도움을 기록하며 ‘제왕의 부활’을 알렸다.

K리그로 복귀한 이동국은 미들즈브러에서 오랜 벤치생활로 경기감각을 잃은 듯 ‘라이언 킹’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2008년 13경기에 출전, 2골 2도움이 전부였다. 그나마 한 골은 페널티킥 골이었다.

정규시즌에 부진했던 이동국에게 6강 플레이오프(PO)는 명예를 되살릴 수 있는 기회였다.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 진정한 스트라이커로서의 체면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훈련 중 오른쪽 허벅지 부상을 입으며 6강 PO 출전 엔트리에조차 들지 못했다. 이처럼 이동국은 왕년의 위용을 잃어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 불투명한 현재… 암울하기만 한 미래

시즌 종료 후 고종수는 퇴출 위기에 몰렸다. 구단에서 “불성실한 자세를 받아줄 수 없다.”며 25일 현재까지도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고 있지 않은 것. 16경기 2득점 1도움이란 올 시즌 기록도 팬들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친 것.

그나마 2008년엔 안정환만이 좋은 활약을 펼쳤다. 친정 부산으로 돌아온 그는 27경기에서 6득점 3도움을 기록하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내년 시즌 그를 국내리그에서 볼 수 있을지 미지수다. 24일 FA자격을 얻은 그는 현재 ‘팀 잔류’와 ‘미국 프로팀 진출’ 사이에서 고민하는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국의 경우도 거취가 불분명하다. 이달 성남에 새로 부임한 신태용 감독은 변화를 촉구했다. 아무리 이동국이라 할지라도 물갈이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지난 17일에는 사우디 등 중동국가에서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 트로이카여 부활하라!

항우장사도 못 비껴간다는 세월의 힘 앞에 왕년의 트로이카는 무력하기만 했다. 미래도 무엇 하나 보장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많은 팬들은 이들의 부활을 꿈꾼다. 이들이 과거에 보여줬던 활약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단순한 ‘선수’ 이상으로 프로축구 부흥이란 ‘축구계의 숙제’를 떠맡아온 아이콘이었다.

이들 셋은 한국축구의 미래를 바라보는 열망을 집약한 ‘돋보기’였다. 단순히 추억 속 인물로 머물러 있기엔 그들이 가진 의미가 너무 크다. 그래서 ‘오래된 미래’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1226500022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200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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